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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있는 섬, 조름도를 다녀와서
- 용유해변 앞 조름도는 주름섬이라고도 불리며 물이 빠지는 간조시간에는 걸어갈 수 있는 작은 섬이다. Ⓒ 아드아재 피천득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이 투명해진다. 특히 1월이 되면 이미 새봄이 온 것이라 말하던 그 '신춘(新春)'의 문장이 참 좋았다. 유난히 추웠던 올 1월,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도 사실은 이미 봄이 시작되었다고 믿게 해준 그 구절은 내게 따스한 플라세보(Placebo) 같은 위로였다. 3월의 첫날인 오늘, 이제는 명실상부한 본격적인 봄이다. 우리 곁에는 신춘(新春), 조춘(早春), 입춘(立春)처럼 봄을 맞이하는 이름들이 참으로 다양하다. 그만큼 우리가 긴 겨울 내내 간절히 봄을 기다려왔다는 증거이자, 설레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용유도 해안가를 달리다 보면, 혹은 해안도로를 빙그르르 돌다 보면 위치에 따라 다른 각도로 얼굴을 내미는 섬 하나가 있다. 바로 조름도다.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참 '맛이 있는' 섬이다. 내게 조름도는 화려한 멋보다는 간이 딱 떨어지는 맛으로 다가오는 섬이다. 조름도에 이르러 춘곤증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조금 작위적인 연결이었을까. 하지만 섬의 이름마저 사람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조름도'라니, 이 봄기운과 섬의 이름을 연결하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었다. 간조 시간에 맞추어 바다가 길을 내어주면, 하루 두 번 모세의 기적처럼 물길이 열린다. 이곳은 고운 모래의 하나개 해변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거친 돌과 날카로운 굴껍데기들이 울퉁불퉁 쌓여 있어, 맨발로 걷는 어싱(Earthing)보다는 단단한 신발을 갖춘 트레킹이 어울리는 곳이다. 섬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연이 빚어놓은 조각상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간절히 기도하는 형상의 바위, 머리만 빼꼼히 내민 귀여운 미어캣 바위, 금방이라도 뒤뚱거리며 걸어 나올 듯한 펭귄 바위까지. 그야말로 파도와 바람이 깎아 만든 거대한 '바위 박물관'이다. 섬 한 바퀴를 오롯이 도는 데 걸리는 20분 남짓한 시간은, 현실의 소란을 잠시 잊기에 더없이 적격인 여정이다. 멋과 맛이 공존하는 영종의 선물 하나개가 화려한 '멋'이 있다면, 조름도는 소박한 '맛'이 있다. 하나개에서의 어싱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꿈결 같은 시간이라면, 조름도에서의 트레킹은 발바닥에 닿는 감각이 생생한 현실의 기쁨이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낫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종도라는 이 너른 품 안에 '멋'과 '맛'이 사이좋게 공존한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우리는 이 섬들 사이를 거닐며 소소한 기쁨을 발견하고, 자연이 내어주는 반사적 광영(光榮)을 온몸으로 누린다. 서정원의 영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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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있는 섬, 조름도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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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선물하는 일상의 근육
-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도시는 편리하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모든 것을 집 앞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시대에 불편함은 곧 청산해야 할 악(惡)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소간의 결핍이 일상이었던 이곳 영종에서 내가 배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감사함의 일상’이다. 얼마전 하늘도시에 새로 문을 연 우편취급국을 찾았다. 예전 같으면 '운동하러 간다'며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서야 했던 길이었지만, 이제는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선다. 가는 길목, 마침 하교 시간인지 학교 문을 열고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과 마주쳤다. 정작 본인들만 자신들이 얼마나 눈부신지 모른 채, 시리도록 푸른 겨울 하늘 아래를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그 청춘들의 쏟아짐이라니. 새로 생긴 우편취급국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만난 그 상콤한 풍경은 뜻밖의 덤이었다. 영종2동 행정복지센터 앞에 문을 연 우편취급국 안도현 시인은 그의 시 〈우체국에 가면〉에서 “세상에 줄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그 말대로, 새로 생긴 이 작은 공간에는 단순히 우편물을 접수하는 기능 이상의 따스함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두 분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짧은 영화 같았다. 새로 부임하셨다는 국장님은 분주히 손을 움직이면서도, 나와 ‘챗GPT가 주는 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정답게 맞장구를 쳐주셨다. 곁에 있던 주니어 직원은 또 어찌나 인상적인지. 깨끗한 피부에 마치 영국 드라마에 나올 법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 친구는, 카드를 깜빡 잊고 당황해하는 어느 할머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넉넉한 미소를 건넸다. “어머나, 어째요.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내일 천천히 오셔도 돼요. 우편물은 잘 보관해 놓을게요.” 그 친절함은 거대한 도심의 무인 자동화 기기 앞에서는 절대 마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우리 동네의 작은 우편취급국만이 줄 수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밀도 높은 온기였다. 내가 느끼는 이런 감사는 결코 “어차피 없으니 좋게 생각하자”는 식의 ‘신포도’ 우화 속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부족함 속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소통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세대들에게 영종은 여전히 부족한 곳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아줌마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차피 너희가 살아갈 세상은 모든 것이 차고 넘치도록 풍요로울 거란다. 그렇기에 지금 너희가 느끼는 그 작은 아쉬움과 불편함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야. 추운 겨울바람을 뚫고 찾아온 우체국에서 뜻밖의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안도감을 얻는 이 경험처럼, 너희에게 보이는 아쉬움들이 결국 어른이 되었을 때 “맞아, 그때 그게 참 소중했지”라고 말할 수 있는 너희만의 가장 단단한 자산이 될 거란다. 결핍은 우리에게 일상을 감사로 채우는 근육을 길러준다. 편리함이라는 매끄러운 포장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삶의 무늬를, 나는 오늘 영종의 작은 우체국 문턱에서 다시 한번 발견한다. 서정원의 영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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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선물하는 일상의 근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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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팔레트 위에 솟아오른 ‘달리’의 신기루
- 서정원의 영종이야기 - (2) 인천대교는 인천 송도와 영종도를 잇는 다리다.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최장 사장교 중 하나. 나에게 이 다리는 관광 명소가 아니다. 육지로 나가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건너야 하는 생활의 통로다. 육지로 향하는 날이면 나는 늘 연안부두의 해수탕으로 향한다. 반복되는 일상, 반복되는 길.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다리에서는 매번 같은 풍경을 보지 못한다. 영종도에서 송도로 향할 때, 시선은 정면이 아니라 자꾸만 백미러로 흐른다. 앞에 펼쳐진 풍경보다, 뒤에 남겨진 영종 앞바다가 나를 붙잡기 때문이다. 백미러 속 바다는 마치 두 얼굴의 여인 같다. 만조일 때면 세상의 모든 물을 끌어모아 은빛 치맛자락을 아낌없이 펼치고, 썰물일 때면 속살처럼 드러난 갯벌을 숨김없이 내보인다. 채워짐도 비워짐도 모두 자연스럽다. 어느 하나 흉하지 않고, 어느 순간도 경이롭지 않은 때가 없다. 안천대교를 배경으로 영종의 하늘이 노을로 물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진짜 마법은 돌아오는 길에 시작된다. 목욕을 마치고 영종도로 향하는 저녁, 하늘은 서서히 라벤더 빛으로 물든다. 그 색은 너무 선명해, 마치 ‘프로방스의 저녁’을 그려낸 한 폭의 명화 같다. 건초에 스며든 라벤더 향이 코끝에 닿는 듯한 착각 속에서, 하루 종일 뾰족해졌던 마음과 몸이 천천히 풀린다. 라벤더와 오렌지, 그리고 터키색이 겹쳐지는 하늘. 그것은 클로드 모네의 팔레트가 통째로 하늘에 쏟아진 듯한 순간이다. 해가 기울수록, 그 황홀한 색채 아래에서 영종도의 윤곽이 서서히 떠오른다. 이때의 영종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그것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바다 위에 솟아난 신기루다. 푸른 파도 대신 모래바람이 불어올 것만 같은 착각.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바다 한가운데서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기묘한 감각이 찾아온다. 이 아이러니한 풍경을 매주 건너며, 나는 깨닫는다. 인천대교는 단순한 교량이 아니라는 것을. 이 다리는 모네와 달리가 영종의 문 앞에서 건네는 가장 비밀스럽고도 황홀한 초대장이다. 그러니 독자여, 인천대교를 그저 공항으로 향하는 빠른 통로로만 지나치지 말기를. 잠시 속도를 늦추고,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기를. 그리고 이 섬에 직접 발을 디뎌보기를. 석양과 파도가 숨겨둔 수많은 비밀이 아직도 영종도에는 남아 있다. Welcome to the Secret Island. 서정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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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팔레트 위에 솟아오른 ‘달리’의 신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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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 영종도. 그 빛나는 비밀
- < 서정원의 영종이야기> 이번호부터 ‘서정원의 영종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서정원님은 행정고시를 거쳐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재직했으며, 10여 년의 외국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여러 곳에서 살다가 영종의 매력에 빠져 영종살이를 시작한 6년차 주민입니다. 틈틈이 글쓰기를 해 온 필자는 무엇보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사물과 사람을 관찰하고 그것을 애정이 가득한 그녀만의 문장으로 풀어내 글맛을 더해 줍니다. 스치고 지나갔던 풍경, 사람들 그리고 영종에 사는 이야기가 그녀의 글에서 새롭게 조명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멋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좋은 글을 기고해 주시기로 한 서정원님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하와이의 찬란한 광채 속에서 나는 뜻밖에도 낙원의 무게를 배웠다. 아무리 태양이 눈부시게 내려앉아도, 사람들의 얽히고설킨 사연이 뒤엉킨 그곳에서 낙원은 끝내 실낙원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그 깨달음을 조용히 품은 채, 나는 영종에 닿았다. 영종의 첫인상은 ‘작은 섬’ 그 자체였다. 자연스레 하와이보다 더 좁고, 더 갇혀 있으리라 오만하게 짐작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첫 바람과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영종의 바람은 오래된 그리움을 품은 듯, 하와이의 습하고 격정적인 기운과는 전혀 다른, 맑고 이완된 공기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고립을 속삭이는 바람이 아니라, 경계로부터의 해방을 알려주는 바람이었다. 영종은 분명 섬이다. 하지만 이곳의 연육교는 섬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 다리는 단지 육지와 이어지는 길이 아니다.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게 해주는 현실의 쉼표이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나만의 낙원’으로 이어지는 은밀한 통로다. 인천의 일부이면서도 세계를 품고 있는 곳? 거대한 활주로를 따라 하늘로 솟아오르는 비행기들은 이 섬의 경계를 매 순간 허물며, 이 작은 땅이 세계의 시작점임을 묵묵히 증명하고 있었다. 영종은 섬이 지닌 고독한 침잠과, 세계로 끝없이 뻗어가는 확장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드문 장소였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랬다. 하와이에서 쌓인 상처 때문에 벽을 두르려 했던 나는, 영종 특유의 담백하고 꾸밈없는 일상 속에서 그 벽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을 알고, 이 도시의 생활을 공유할수록 영종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다시 빛을 되찾은 낙원으로 자리 잡았다. 영종은 내가 잃었던 낙원을 다시 세워준, 숨어 있는 나의 빛나는 비밀이다. 이제 그 비밀을 하나씩 풀어가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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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 영종도. 그 빛나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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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있는 섬, 조름도를 다녀와서
- 용유해변 앞 조름도는 주름섬이라고도 불리며 물이 빠지는 간조시간에는 걸어갈 수 있는 작은 섬이다. Ⓒ 아드아재 피천득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이 투명해진다. 특히 1월이 되면 이미 새봄이 온 것이라 말하던 그 '신춘(新春)'의 문장이 참 좋았다. 유난히 추웠던 올 1월,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도 사실은 이미 봄이 시작되었다고 믿게 해준 그 구절은 내게 따스한 플라세보(Placebo) 같은 위로였다. 3월의 첫날인 오늘, 이제는 명실상부한 본격적인 봄이다. 우리 곁에는 신춘(新春), 조춘(早春), 입춘(立春)처럼 봄을 맞이하는 이름들이 참으로 다양하다. 그만큼 우리가 긴 겨울 내내 간절히 봄을 기다려왔다는 증거이자, 설레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용유도 해안가를 달리다 보면, 혹은 해안도로를 빙그르르 돌다 보면 위치에 따라 다른 각도로 얼굴을 내미는 섬 하나가 있다. 바로 조름도다.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참 '맛이 있는' 섬이다. 내게 조름도는 화려한 멋보다는 간이 딱 떨어지는 맛으로 다가오는 섬이다. 조름도에 이르러 춘곤증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조금 작위적인 연결이었을까. 하지만 섬의 이름마저 사람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조름도'라니, 이 봄기운과 섬의 이름을 연결하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었다. 간조 시간에 맞추어 바다가 길을 내어주면, 하루 두 번 모세의 기적처럼 물길이 열린다. 이곳은 고운 모래의 하나개 해변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거친 돌과 날카로운 굴껍데기들이 울퉁불퉁 쌓여 있어, 맨발로 걷는 어싱(Earthing)보다는 단단한 신발을 갖춘 트레킹이 어울리는 곳이다. 섬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연이 빚어놓은 조각상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간절히 기도하는 형상의 바위, 머리만 빼꼼히 내민 귀여운 미어캣 바위, 금방이라도 뒤뚱거리며 걸어 나올 듯한 펭귄 바위까지. 그야말로 파도와 바람이 깎아 만든 거대한 '바위 박물관'이다. 섬 한 바퀴를 오롯이 도는 데 걸리는 20분 남짓한 시간은, 현실의 소란을 잠시 잊기에 더없이 적격인 여정이다. 멋과 맛이 공존하는 영종의 선물 하나개가 화려한 '멋'이 있다면, 조름도는 소박한 '맛'이 있다. 하나개에서의 어싱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꿈결 같은 시간이라면, 조름도에서의 트레킹은 발바닥에 닿는 감각이 생생한 현실의 기쁨이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낫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종도라는 이 너른 품 안에 '멋'과 '맛'이 사이좋게 공존한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우리는 이 섬들 사이를 거닐며 소소한 기쁨을 발견하고, 자연이 내어주는 반사적 광영(光榮)을 온몸으로 누린다. 서정원의 영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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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있는 섬, 조름도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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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선물하는 일상의 근육
-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도시는 편리하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모든 것을 집 앞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시대에 불편함은 곧 청산해야 할 악(惡)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소간의 결핍이 일상이었던 이곳 영종에서 내가 배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감사함의 일상’이다. 얼마전 하늘도시에 새로 문을 연 우편취급국을 찾았다. 예전 같으면 '운동하러 간다'며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서야 했던 길이었지만, 이제는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선다. 가는 길목, 마침 하교 시간인지 학교 문을 열고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과 마주쳤다. 정작 본인들만 자신들이 얼마나 눈부신지 모른 채, 시리도록 푸른 겨울 하늘 아래를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그 청춘들의 쏟아짐이라니. 새로 생긴 우편취급국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만난 그 상콤한 풍경은 뜻밖의 덤이었다. 영종2동 행정복지센터 앞에 문을 연 우편취급국 안도현 시인은 그의 시 〈우체국에 가면〉에서 “세상에 줄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그 말대로, 새로 생긴 이 작은 공간에는 단순히 우편물을 접수하는 기능 이상의 따스함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두 분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짧은 영화 같았다. 새로 부임하셨다는 국장님은 분주히 손을 움직이면서도, 나와 ‘챗GPT가 주는 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정답게 맞장구를 쳐주셨다. 곁에 있던 주니어 직원은 또 어찌나 인상적인지. 깨끗한 피부에 마치 영국 드라마에 나올 법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 친구는, 카드를 깜빡 잊고 당황해하는 어느 할머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넉넉한 미소를 건넸다. “어머나, 어째요.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내일 천천히 오셔도 돼요. 우편물은 잘 보관해 놓을게요.” 그 친절함은 거대한 도심의 무인 자동화 기기 앞에서는 절대 마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우리 동네의 작은 우편취급국만이 줄 수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밀도 높은 온기였다. 내가 느끼는 이런 감사는 결코 “어차피 없으니 좋게 생각하자”는 식의 ‘신포도’ 우화 속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부족함 속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소통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세대들에게 영종은 여전히 부족한 곳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아줌마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차피 너희가 살아갈 세상은 모든 것이 차고 넘치도록 풍요로울 거란다. 그렇기에 지금 너희가 느끼는 그 작은 아쉬움과 불편함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야. 추운 겨울바람을 뚫고 찾아온 우체국에서 뜻밖의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안도감을 얻는 이 경험처럼, 너희에게 보이는 아쉬움들이 결국 어른이 되었을 때 “맞아, 그때 그게 참 소중했지”라고 말할 수 있는 너희만의 가장 단단한 자산이 될 거란다. 결핍은 우리에게 일상을 감사로 채우는 근육을 길러준다. 편리함이라는 매끄러운 포장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삶의 무늬를, 나는 오늘 영종의 작은 우체국 문턱에서 다시 한번 발견한다. 서정원의 영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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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팔레트 위에 솟아오른 ‘달리’의 신기루
- 서정원의 영종이야기 - (2) 인천대교는 인천 송도와 영종도를 잇는 다리다.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최장 사장교 중 하나. 나에게 이 다리는 관광 명소가 아니다. 육지로 나가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건너야 하는 생활의 통로다. 육지로 향하는 날이면 나는 늘 연안부두의 해수탕으로 향한다. 반복되는 일상, 반복되는 길.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다리에서는 매번 같은 풍경을 보지 못한다. 영종도에서 송도로 향할 때, 시선은 정면이 아니라 자꾸만 백미러로 흐른다. 앞에 펼쳐진 풍경보다, 뒤에 남겨진 영종 앞바다가 나를 붙잡기 때문이다. 백미러 속 바다는 마치 두 얼굴의 여인 같다. 만조일 때면 세상의 모든 물을 끌어모아 은빛 치맛자락을 아낌없이 펼치고, 썰물일 때면 속살처럼 드러난 갯벌을 숨김없이 내보인다. 채워짐도 비워짐도 모두 자연스럽다. 어느 하나 흉하지 않고, 어느 순간도 경이롭지 않은 때가 없다. 안천대교를 배경으로 영종의 하늘이 노을로 물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진짜 마법은 돌아오는 길에 시작된다. 목욕을 마치고 영종도로 향하는 저녁, 하늘은 서서히 라벤더 빛으로 물든다. 그 색은 너무 선명해, 마치 ‘프로방스의 저녁’을 그려낸 한 폭의 명화 같다. 건초에 스며든 라벤더 향이 코끝에 닿는 듯한 착각 속에서, 하루 종일 뾰족해졌던 마음과 몸이 천천히 풀린다. 라벤더와 오렌지, 그리고 터키색이 겹쳐지는 하늘. 그것은 클로드 모네의 팔레트가 통째로 하늘에 쏟아진 듯한 순간이다. 해가 기울수록, 그 황홀한 색채 아래에서 영종도의 윤곽이 서서히 떠오른다. 이때의 영종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그것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바다 위에 솟아난 신기루다. 푸른 파도 대신 모래바람이 불어올 것만 같은 착각.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바다 한가운데서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기묘한 감각이 찾아온다. 이 아이러니한 풍경을 매주 건너며, 나는 깨닫는다. 인천대교는 단순한 교량이 아니라는 것을. 이 다리는 모네와 달리가 영종의 문 앞에서 건네는 가장 비밀스럽고도 황홀한 초대장이다. 그러니 독자여, 인천대교를 그저 공항으로 향하는 빠른 통로로만 지나치지 말기를. 잠시 속도를 늦추고,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기를. 그리고 이 섬에 직접 발을 디뎌보기를. 석양과 파도가 숨겨둔 수많은 비밀이 아직도 영종도에는 남아 있다. Welcome to the Secret Island. 서정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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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 영종도. 그 빛나는 비밀
- < 서정원의 영종이야기> 이번호부터 ‘서정원의 영종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서정원님은 행정고시를 거쳐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재직했으며, 10여 년의 외국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여러 곳에서 살다가 영종의 매력에 빠져 영종살이를 시작한 6년차 주민입니다. 틈틈이 글쓰기를 해 온 필자는 무엇보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사물과 사람을 관찰하고 그것을 애정이 가득한 그녀만의 문장으로 풀어내 글맛을 더해 줍니다. 스치고 지나갔던 풍경, 사람들 그리고 영종에 사는 이야기가 그녀의 글에서 새롭게 조명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멋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좋은 글을 기고해 주시기로 한 서정원님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하와이의 찬란한 광채 속에서 나는 뜻밖에도 낙원의 무게를 배웠다. 아무리 태양이 눈부시게 내려앉아도, 사람들의 얽히고설킨 사연이 뒤엉킨 그곳에서 낙원은 끝내 실낙원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그 깨달음을 조용히 품은 채, 나는 영종에 닿았다. 영종의 첫인상은 ‘작은 섬’ 그 자체였다. 자연스레 하와이보다 더 좁고, 더 갇혀 있으리라 오만하게 짐작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첫 바람과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영종의 바람은 오래된 그리움을 품은 듯, 하와이의 습하고 격정적인 기운과는 전혀 다른, 맑고 이완된 공기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고립을 속삭이는 바람이 아니라, 경계로부터의 해방을 알려주는 바람이었다. 영종은 분명 섬이다. 하지만 이곳의 연육교는 섬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 다리는 단지 육지와 이어지는 길이 아니다.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게 해주는 현실의 쉼표이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나만의 낙원’으로 이어지는 은밀한 통로다. 인천의 일부이면서도 세계를 품고 있는 곳? 거대한 활주로를 따라 하늘로 솟아오르는 비행기들은 이 섬의 경계를 매 순간 허물며, 이 작은 땅이 세계의 시작점임을 묵묵히 증명하고 있었다. 영종은 섬이 지닌 고독한 침잠과, 세계로 끝없이 뻗어가는 확장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드문 장소였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랬다. 하와이에서 쌓인 상처 때문에 벽을 두르려 했던 나는, 영종 특유의 담백하고 꾸밈없는 일상 속에서 그 벽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을 알고, 이 도시의 생활을 공유할수록 영종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다시 빛을 되찾은 낙원으로 자리 잡았다. 영종은 내가 잃었던 낙원을 다시 세워준, 숨어 있는 나의 빛나는 비밀이다. 이제 그 비밀을 하나씩 풀어가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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