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1-19(수)

잊혀진 ‘용유도의 독립만세운동’을 되찾은 어느 촌로(村老)의 이야기

- 용유도의 산 역사 나수영 前용유면장이 들려주는 우리동네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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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2.25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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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3.1절과 용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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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기념비 - 용유행정복지센터 인근에 조성된 ‘3·1독립만세 기념비’. 인천 중구청에서는 2018년 추모공간 리모델링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카페촌으로 변한 마시란해변에서 을왕리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과거 용유중학교가 있던 자리 옆에 ‘3·1독립만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용유도에서 메아리쳤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소리를 담은 기념비는 1983년 용유·무의 주민들의 뜻을 모아 건립하게 되었다. 자칫 잊혀질 뻔 했던 ‘용유도의 독립만세운동’을 후대가 기억할 수 있게 기념비를 건립한데에는 한 촌로(村老)의 역할이 컸다. 1929년 용유도 덕교리에서 태어나 1953년 용유면 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고 28년 동안 용유를 지키면서 용유면장을 역임한 나수영 어르신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19년 3월 28일 ‘용유도의 독립만세운동’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시자 이는 일본이 독살한 것이라고 하여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고종황제의 국장이 3월 3일로 정해지면서 많은 국민이 서울로 모이게 되었고 마침내 3월 1일 정오를 기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탑골공원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독립만세운동은 전국팔도로 들불처럼 전개되었다. 인천지역도 창영초등학교(3월 3일)와 황어장터(3월 26일) 등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용유지역에서는 서울 배재학당 재학 중인 19세의 조명원이 기미독립선언 당시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3월 23일 귀향하여 동네 청년들에게 서울의 만세운동소식을 전하고 용유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는 거사를 계획한다.
1919년 3월 23일과 24일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에 사는 조종서·최봉학·문무현 등은 조명원의 집(현재 조병수 가옥)에 모여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혈성단(血誠團)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들은 3월 28일을 거사일로 잡고, 광목으로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조종서 등 4명이 분담하여 '조선독립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현재 용유행정복지센터)에 모이라'는 취지의 격문 80여 통을 작성하여 각 마을에 돌렸다.

 

3월 28일 4명의 주도자와 각 지역의 선봉인 윤치방·김윤배·윤보신·유웅렬·구길서·오기섭이 관청리 광장에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자 주민 150여 명이 호응하여 앞서 만들어 두었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윽고 을왕리에서 이난의 등 많은 군중이 모여 조명원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관청리를 향해 만세행진을 했다. 이들은 을왕리 늘목-남북리 관청말-덕교리 오성산-무의도 맛부리에서 만세운동을 한 것이다.
이 만세운동으로 조명원 등 11명이 일본 경찰에 의해 전원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조명원은 징역 1년 6월, 조종서·최봉학·문무현은 징역 1년, 윤치방·김윤배·윤보신·유웅렬·구길서·오기섭 등은 태형 90도 등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옥중에서의 고문과 폭행, 태형의 결과로 출옥 후에 육체적 고통이 많았다는 가족들의 증언을 나수영 어르신은 기억하고 있다.
  
잊혀진 ‘용유도 독립만세운동’을 되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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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독립열사가 혈성단을 결성했던 조명원 옹의 집. 현재 ‘조병수 가옥’으로 1997년 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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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면장을 지내신 나수영 어르신은 지역 출신 인사들과 뜻을 모아 용유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잊지 않기 위해 ‘기념비’건립사업을 추진했다.

 

1953년 면서기가 된 나수영 어르신은 병사, 회계, 재무, 총무직을 두루 거치면서 용유면의 업무를 봐왔다. 그리고 1981년 53세에 사직할 때까지 14년간 면장을 지냈다고 한다. 영종면에서 그 사이 면장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용유에서는 주민들의 신임이 높았던 터라 오랜 기간 면장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면장일을 하면서 용유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좀 배우고 일할 만한 사람은 전부 육지로 가 있어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거지. 1981년에 꽃게수출 사업을 하려고 면장을 그만뒀는데 그때 고향 형님들이 많이 찾아와서 고향에 뜻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고 면민회를 만들자고 했지. 당시 용유도 남북동 출신인 추석민 도의원을 추대해 ‘독립만세운동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게 되었지” 

 

당시에는 정부가 이런 사업에 나서지 않아 주민들이 직접 고향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정신을 새기기 위해 추진하게 된 것이다. 용유·무의 12곳 마을에서 10만원씩을 부담하고 주민들과 이 지역 출신들에게 기념비를 건립할 비용을 모금했다. 그렇게 1년간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모은 금액은 610만원. 기념비를 건립하는 데는 2~3백만원이 모자랐는데 기념비 제작 설치를 맡은 충남석재사 백완기 대표는 주민들의 뜻을 헤아리고 본인이 부담했다고 한다.
그렇게 기념비 건립사업은 시작되었고 1983년 3월 28일 ‘용유면 3·1독립만세 기념공적비’가 세워지게 된다. 용유·무의 주민들은 용유중학교 교정에 모여 축하행사와 제막식을 열었다. 그러나 기념비는 본체 1기만 기공 완료된 채 기록사항과 자금사정, 위원회 해체, 면민회 구성 등의 문제와 위원장 결원 등으로 사업추진이 중단되었다가 34년이 지난 2017년 9월 12일에 비석 1기를 추가 건립하게 되었고 2018년 중구청의 추모공간 리모델링 사업을 시작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나수영 어르신은 지난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비 건립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홍인성 중구청장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하지만 나수영 어르신은 또 하나의 소망이 있다.
“조상들의 정신, 얼이라고 하지. 그런 정신을 바탕에 두고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지난 역사에 대한 기록을 한곳에 모아 전시하면서 후손들이 선조들의 얼을 배워가야 하는 것이지.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후손을 모두 찾아내고 그 후손들이 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줘야지”
용유에서 태어나고 지금까지 이곳을 지켜온 나수영, 윤정옥 어르신. 19세 18세에 만나 결혼하고 72년 동안 평생의 동반자로 함께 살고 계신다. 용유도 덕교동 미애네칼국수 본점 옆 아담한 가옥에는 황혼의 두 어르신이 알콩달콩 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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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나수영 어르신은 기념비 건립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홍인성 중구청장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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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용유중학교에서 열린 기념식 (나수영 어르신 소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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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최초 조성시 기념비 (나수영 어르신 소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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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수영·윤정옥 어르신은 용유면 덕교리 출신으로 19살에 결혼해 72년을 고향에서 함께 살고 계신다. 아내와는 한 살 차이로 슬하에 아들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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