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장이 되고 된장이 되어… 다시 사랑으로
- 홀로 사는 이웃에게 전하는 전통의 맛
해마다 봄이 문을 두드릴 무렵이면 스카이자이아파트 경로당 마당에는 구수한 메주 냄새가 먼저 번진다. 바람 끝이 아직은 차가워도 장을 담그기에는 바로 이때가 좋다고 어르신들은 말한다. 지난 25일, 겨울을 건너온 메주가 햇볕과 바람을 만나 깊은 숨을 고르며 전통의 맛을 잔뜩 품고 있었다.
“장은 정월 지나고 날 풀리기 시작할 때 담가야 해요. 그래야 맛이 순해요.”
경로당 강재섭 회장은 커다란 장독 앞에서 소금물의 농도를 가늠하며 말했다. 담담한 말투 속에는 해마다 이어온 시간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스카이자이 경로당이 간장을 담그기 시작한 지도 여러 해. 이제는 봄을 알리는 하나의 의식이 됐다.
이날도 강재섭 회장을 비롯해 김경자, 이순자, 강영자 씨 등 회원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았다. 누군가는 메주를 솔로 털고, 누군가는 소금물을 맞추고, 또 누군가는 장독을 깨끗이 씻는다. 손놀림은 느리지만 정확하다. 오랜 세월 부엌과 장독대를 지켜온 손길이다.
“우리가 먹을 것도 조금은 남겨야지.”
김경자 씨가 웃으며 말하자 이순자 씨가 곧장 받는다.
“그래도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 생각하면 아끼면 안 돼.”
이곳에서 담그는 간장은 경로당 식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주변에 홀로 사는 어르신들에게도 나눈다. 작은 병에 간장을 담아 건넬 때면 간장보다 따뜻한 말이 먼저 오간다.
“혼자 계시면 반찬 하기도 번거롭잖아요. 이걸로 국도 끓이고 나물도 무쳐 드세요.”
강영자 씨는 간장을 건네며 꼭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 말속에는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따뜻한 확인이 담겨 있다.
장 담그는 날은 유난히 웃음이 많다. 소금물의 농도를 두고 “짜다”, “싱겁다” 의견이 갈리면 강재섭 회장이 다시 한번 맛을 본다.
“이 정도면 됐어요. 장은 기다림이 반입니다.”
기다림. 그 말처럼 장독 속 시간은 조용히 흐른다. 메주가 소금물에 잠긴 채 몇 달이 지나면 위에는 맑은 간장이 떠오르고 아래에는 된장이 내려앉는다. 초여름 햇살을 몇 번 더 받고 나서야 간장은 빛이 짙어지고 맛은 깊어진다.
“처음엔 다 같은 물인데 시간이 지나면 나뉘잖아요. 간장은 간장대로, 된장은 된장대로.”
이순자 씨는 장독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말한다. 그 말은 사람 사는 모습과도 닮았다. 함께 담갔어도 각자의 맛으로 익어가는 시간. 그렇게 익은 된장은 다시 한번 손을 거쳐 고운 항아리에 담긴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찌개 속에서 구수한 향으로 피어난다. 강재섭 회장은 마지막으로 장독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창하진 않아요. 그래도 이 간장 하나로 누군가의 밥맛이 살아난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경로당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에게 장 담그기는 단순한 음식 준비가 아니다. 계절을 맞이하는 일이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이며, 더불어 이웃의 식탁을 살피는 일이다.
봄에 담근 장은 여름과 가을을 지나며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그 깊이만큼 이웃을 향한 마음도 함께 익어간다. 장독대 위로 햇살이 내려앉는 오후, 스카이자이아파트 경로당에는 오늘도 구수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