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자신만만
친구1. 친구는 회사에서 퇴근하여 집에 들어가면, 아내와 두 자식이 모두 현관에 나와 인사를 해야 신발 벗고 거실로 들어갔단다. 다만 샤워를 하는 사람은 예외였는데, 샤워를 끝내고 나올 때까지 방에서 외출복을 벗지 않고 기다렸다가 인사를 받은 후 넥타이를 풀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꼰대 일짱’이라 불렀고 그 소문은 자식들 친구에게도 유명해져 집에 놀러 온 아들 친구들도 아버지께 먼저 인사를 하고 놀았다고 한다. 뼈대 있는 가문의 몇 대손으로서 가풍이란다. 자식들이 취직한 후에는 부모님께 봉급의 10%를 내놓도록 했다는 말에 같은 세대의 아버지로 살아온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가족 풍속도가 많이 바뀐 21세기에 이렇게 가부장적인(?) 삶이 그의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의아했다. 만약 눈치 빠르다는 강아지를 집에서 키웠다면 강아지도 현관에 나와 인사를 했겠다 싶었다. 어느 날 만남에서 자식에게 받은 십일조로 점심을 산다 해서 맛있게 얻어먹었는데, 집에서 쉬고 있는 그가 요즈음은 자식들이 출근할 때 배웅을 해준다고 하니 큰 반전이다.
친구2. 노래를 좋아하는 내 친구는 노래방에 가는 것을 즐겨한다. 그런데 그 친구의 노래는 음정과 박자가 영 맞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음치다. 그의 18번 노래가 끝나면 친구들은 재미있어 박장대소하며 앙코르를 외치고, 그 친구는 주저하지 않고 다음 노래를 선곡한다. 노래방을 끝낼 즘에 조용한 노래를 ‘손에 손잡고’ 합창을 했는데, 그 친구의 목소리가 모두의 목소리를 압도했다. 그 친구의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음치는 자기가 음치라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 본인이 부르는 노래가 박자와 음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에 그렇게 자신 있게 부르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남은 잘 알면서 가끔 나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노래가 끝나고 파할 무렵 한 친구가 그에게 ‘너 목청 엄청나게 크고 좋다. 그런데 혹시 너 노래를 부를 때 반주나 옆 사람 노랫소리를 듣냐?’라고 물으며, ‘합창할 때는 같이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 봐라’라고 했다. 노래는 잘 부르는 사람을 위한 것만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내 감정과 만족도 중요하지만, ‘함께 부르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균형을 맞추고 조화를 이루라는 말’이라는 것을 느꼈다.
합창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다. 내 말만 들어달라고 목청 높이지 않고, 같이 살아가는 옆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소통은 자연스레 이루어지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