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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기사

  • 용유도 포장마차 사람들의 애환
    3월 29일로 인천국제공항이 개항 20주년을 맞는다. 우리가 사는 영종·용유 지역이 국가의 관문이 되었고 인천국제공항은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우수 공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인천공항의 화려함과 자부심 뒤에는 공항에 삶의 터전을 내준 주민들의 애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항이 들어서고 다리가 생겨 섬이 아닌 섬이 된 용유도에는 2000년대 초부터 해변가에 포장마차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공항에 삶의 터전을 내준 주민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부녀회를 중심으로 포장마차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외지인들이 해변가를 점유하고 포장마차를 우후죽순 늘려가면서 거잠포와 마시란 해변을 비롯한 용유도 해변 일대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갔다. 이후 이 지역이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어 관리청인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서는 용유도 해변에 무분별한 영업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포장마차 촌을 조성해 65개의 관광형 포장마차를 허가해 주었다. 이때 320명 가량 부녀회 주민대표들이 경제청에 가설건축물 음식업 허가를 받아 관광형 포장마차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을왕동, 덕교동, 남북동 8개통에 주민용 가설 포장마차 26개 동이 성업을 이루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용유·무의지역에 외자를 유치해 복합도시로 대대적으로 개발한다고 주민들의 기대감을 부추겼고, 개발을 위해 경제청에서는 허가한 65개 포장마차에 대해서 2008년 4월 주민들과 협상을 벌여 자진 철거하면 3년 내로 다른 장소에 영업할 수 있게 시설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포장마차 촌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주민대표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이 도장까지 찍고 확약했던 사안이다.  그러나 단군이래 최대의 개발사업이라던 용유·무의 복합도시개발 에잇시티 계획이 무산되면서 주민들과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제청의 조치를 10여 년 동안이나 목이 빠지게 기다려 온 주민들은 한 숨이 깊어지고 있다. 필자 역시 2년 전 용유도 관광포장마차와 관련해 부녀회 등 주민 대표들과 소통의 자리를 가졌었고 주민들의 하소연을 듣기도 했다. 주민들에게는 생계가 달린 먹고 사는 문제를 공공기관이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고 시간이 해결해 줄 것 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갖는다면 안 될 일이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몸소 체감하고 있다. 공공재의 일꾼들이 주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가지고 약속을 위반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묻고 싶다. 당시 덕교동 주민대표 김영근 씨와 부녀회 대표 강영숙씨는 경제청과 협의를 했던 당사자들로 기관의 책임있는 문제해결을 호소하고 있다. 관계기관이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해결을 위한 의지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2000년대 초 용유동 지역은 인천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어 행정의 전부를 경제청이 주관하고 있었고 중구청은 관내지역이지만 행정적으로 크게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았겠는가 싶다. 이런 행정 시스템 때문에 이 같은 일이 벌어졌고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나 지금의 토지주인 인천도시공사는 이 문제를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문제 의식을 갖고 하루 빨리 해결에 나서야 한다.  담당 직원이 자주 바뀐다는 이유로 이 일을 모른 척하고 피하기만 한다면 주민들의 답답함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당시 철거 조건 중에 3년 내에 공사를 발주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사탕발림으로 포장마차 촌을 철거했으면 이제는 회피하지 말고 서로 대화를 통해 소통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조택상 정무부시장이 취임하고 나서 인천시청을 방문한 후 느낀 점은 소통에 답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청 앞에서 민원 해결을 위해 집회를 열던 단체들이 모두 철수하고 그 자리가 말끔하게 정리된 모습을 보고 역시 소통에 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우리 지역 용유동의 일 또한 소통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주민들의 생계가 달린 문제라는 점을 항상 상기하며 작은 동네의 일이라 치부하지 말고 멋진 행정을 보여주는 주역들이 되시길 기대해본다. 주민들은 박남춘 시장의 뜻을 믿고 기다리고 있다.     전 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회장  김홍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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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무의도의 보물 하나개 해수욕장
    하나개 해수욕장과 호룡곡산 국사봉이 있는 무의도는 수도권 시민들이 한 시간이면 찾을 수 있는 힐링의 섬으로 우리 지역의 보물입니다. 이 보물을 더욱 아름답게 가꿔가는 지역 공동체의 노력이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인생길에서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무의 10통 하나개 해수욕장 번영회 장동준 회장을 만나 지역의 얼과 애향이 싹트는 훈훈한 마음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힘들 때 서로 기댈 수 있고 아플 때 곁에 있어줄 수 있는 동네의 이웃들이 정다운 이곳은 지금의 사회적 기업을 20여 년 전부터 실천해 오고 있는 자랑스러운 마을입니다.  그 중심에 장동준 회장이 있어 지역의 사랑을 느낀 시간이었고, 이분과 함께 동행하는 부회장 차양섭씨도 서로 눈을 맞추며 같은 뜻을 이어가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51명인 하나개 번영회 회원님들은 자발적으로 역할분담을 해서 청소와 해수욕장 관리 및 안내를 일사분란하게 처리하고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자 노력하는 모습에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여름성수기에는 구청에서 공공근로 인력을 투입하지만 무의대교 개통으로 사계절 많은 관광객이 찾다보니 자연환경을 정비하고 등산객과 바닷가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은 번영회 회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번영회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청정한 자연환경과 깨끗하게 관리된 해수욕장을 즐기면서 ‘주위 사람들과 다시 한 번 꼭 오겠다’는 말을 들을 때 힘든 노고가 얼음 녹 듯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회원님들의 웃는 모습이 더욱 순박한 동네 구성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의10통의 협동과 단결 애향심이 장동준 번영회장님의 리더십 속에 묻어나는 정을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큰 의미가 없겠지요. 하나개 해수욕장 번영회의 작은 사무실에는 늘 이야기가 풍성하고 들어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동체에 행정기관이 나서서 관광객들이 좀 더 편하게 쉬고 주민들의 소득이 증대 될 수 있도록 번듯한 상가와 숙박시설이 들어 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더욱 활성화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번영회 회원들이 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더 예쁜 풍경을 보여드리고자 해수욕장 주변에 보도블럭을 깔고 있었습니다. 번영회원들의 뜻을 모아 자비를 들여 더 아름다운 유원지를 만들어가는 모습에 찬사를 보냅니다.  이곳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성수기에 물이 부족한 것이라고 합니다. 비가 올 때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화장실에 사용하는가 하면, 시간을 조정해 급수를 해 관광객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 빨리 상수도가 공급되어 아름다운 하나개 해수욕장이 수도권의 중심 해수욕장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이곳 하나개에서는 해수욕장과 함께 강종구 어촌계장님을 중심으로 어촌 체험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갯벌의 가치를 일깨우고 수산업의 관광 상품화가 필요한 때에 갯벌과 바다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사업입니다. 물론 이 지역을 활성화 시키고자 애쓰신 분 중에는 중구의회 의원을 역임하신 김창복 전 의원님의 노력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하나개가 있기까지 많은 씨앗을 뿌리셨고 지금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기준 현 인천수협 감사님도 번영회 중심에 계셨던 분입니다. 광명항이 있는 무의 11통장을 역임하신 김종철님은 하나개 초입에서 신광명식당을 운영하시는데, 하나개 해수욕장 자랑을 많이 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김영길 무의교회 권사님은 이 지역에서 신망이 두텁지만 앞장서서 지시하지 않고 후배들의 일을 묵묵하게 지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씨뿌리고 숨은 곳에서 노력하고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모습이 하나개 해수욕장 번영회를 더욱 결속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을공동체로 이끌어가는 하나개 해수욕장 번영회가 더욱 부흥할 수 있도록 장동준 번영회장님과 번영회 회원님들을 응원합니다. 아울러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어울리는 여러 시설이 들어서서 주민들의 소득도 올리고 관광객들도 편하게 쉬어 갈 수 있도록 행정기관의 적극적인 행정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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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0
  • 농협 조합원의 퇴직금
    ‘담양농협 조합원 전국 처음 퇴직금 받는다’ 지난 12월 7일 농민신문 1면의 기사 제목이다. 농협의 조합원은 한 해 결산이 끝나면 조합 사업을 통해 쌓은 잉여금을 출자한 조합원에게 출자금 배당을 하고 또 조합원이 조합 사업을 이용한 금액에 따라 이용고 배당을 하게 된다.  필자가 중구농협 조합장으로 재임시, 쌀 80kg 한 가마당 수매를 한 농민 조합원에게 만 오천원 이용고 배당을 했다. 당시 마을 좌담회에서 이 금액은 농민 퇴직금이라고 무수히 설명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외 영농자재, 예금, 대출 모든 분야에 퇴직금을 이용고 배당금으로 적립했었다.    중구농협이 십 여년 전에 했던 것을 시골의 작은 농협이 경영기법을 전수받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담양의 작은 농협도 조합원을 위해 선두의 행정을 하고 있는데 중구농협 조합원 배당은 너무 미미해서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장년 농업인이 예전에 적립했던 출자금을 조합원에서 탈퇴하며 돌려받아 가정 살림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이야기에 씁쓸함을 느끼면서 ‘만약 잉여금이 더 많이 배당된다면 누가 탈퇴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조합원 모두의 숙제이다.   지금 농업 농촌은 고령화 되어가고 있다. 농업인 소득은 국민평균소득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바로 협동조합이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볼 때이다. 퇴직금 제도가 정관에 이용고라는 명목으로 제도화 된다면 농협을 탈퇴하라고 권유해도 탈퇴하지 않게 될 것이다.  중구 농협은 도시 농협이다, 대도시 농협의 살림살이가 시골 농협의 살림 규모만도 못하다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지도 사업비 비용을 줄여서 조합원에게 이용고 배당을 늘리는 것도 방법이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 한 번 성한 것은 언젠가 반드시 쇠하여 지는 법이다. 넉넉한 충당금을 만들어 흑자를 내고 경영이 탄탄한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누가 봐도 참 좋은 농협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중구농협은 1989년 6월 1일 대한민국 최초 분할 설립된 농업협동조합이다. 당시 조합원 이기원, 조규종, 이순신, 김영호, 김홍복이 자금을 갹출하여 어렵게 출발점을 만들었다. 당시 추이흥 옹진농협 감사와 정영덕 대의원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뜻을 가지고 오늘의 중구농협의 씨앗을 뿌렸다. 그 씨앗이 아름다운 씨앗을 맺어 조합원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기를 소망해본다.  조직은 늘 개혁하지 않으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나라 천 백 개의 농협이 모두 성장을 하고 있는데 유독 중구농협만 자산을 팔아서 결산을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끔한 지적도 귀 기울여 듣고, 고칠 것은 고쳐나가 결실의 씨앗을 만들길 기대해본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좋은 토양을 만나야 제대로 뿌리내리고 싹틀 수 있다. 모든 임직원과 조합원들의 뜻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소통하는 중구농협이 되길 축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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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0
  • 천년고찰 용궁사를 지역의 명소로
                    김홍복 - 전 중구청장   지난 11월 24일(음력 10월 10일) 좋은 날을 택해 용궁사 대웅전 상량식을 가졌다. 참 감개무량한 일이다. 용궁사 관광 명소의 첫 걸음의 시작이었다. 세계로 향하는 공항이 있는 국제도시의 중앙에 1300년 역사의 용궁사가 있다. 종교를 떠나 지역 관광명소화에 우리 지역 모두의 뜻이 모아져 오랜 기다림 끝에 상량식을 할 수 있었다.    긴 마루라는 뜻을 가진 영종은 이제 국제공항뿐만 아니라 경제자유특구인 국제도시로서 그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국제도시에 맞는 명소를 만들어 훗날 더 빛나는 영종의 브랜드를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 선조들은 이곳 긴마루 영종을 송나라 사신 대접 군례 의식 장소로 활용했으며 당시에는 경원정 제물사 필수코스로 꼽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우리의 아름다운 영종 긴마루를 잘 보존해야겠다.  상량식을 지켜보면서 용궁사 주지 능해 스님의 열정에 신도들이 한 마음으로 동행하는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용궁사는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5호 신라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태고종 사찰이다. 1854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창건 되었으며 대원군이 직접 쓴 용궁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용궁사에는 수령 1300년의 두 그루 느티나무 암수 나무가 용궁사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용궁사의 관광명소화 시작은 2010년 중구청에서 용역을 통하여 국제도시 명소화를 추진하고 있었으나 지방정부 집행부가 이관되는 과정에서 지체되었고, 이제 민선8기 박남춘 시장의 지방정부 출범과 함께 다시 용역결과를 가지고 명소화를 추진하고 있다. 비록 늦은 출발을 했지만 시작의 미약함에 비해 창대함을 느낄 시간이 오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1300년 동안 못한 일들을 능해 주지스님과 동행하는 이들이 함께 일궈가는 모습을 보며 다 같은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는 동안 사는 것처럼 살라는 말처럼 국제도시 중심에 용궁사의 멋진 그림을 들었다. 우리 지역의 힘은 희망이다. 우리가 1300년을 기다렸듯이 희망의 땅으로 이 곳 용궁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 길을 영종국제도시 10만 명이 함께 만들어 가야 훗날 참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밝고 귀한 기운이 많은 주민들에게도 전해지리라 믿는다.  오래 볼수록 반짝이는 별처럼 용궁사가 늘 새로운 명소가 되도록 동행을 부탁드리고 싶다. 무엇보다 용궁사 신도들이 앞장서서 선두에서 인도해주시길 바란다. 혹자는 종교의 벽에 갇혀 편향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 지역에 꼭 필요한 명소화 작업에 함께해 주시길 당부드린다. 용궁사 명소화 작업의 시작과 함께 많은 분들이 뜻을 모아 주신다면 일생에 좋은 행동 지침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 용궁사는 석축 재정비 공사도 진행하고 있다. 석축이 일본식의 정원석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의 석축으로 재정비하고 있다. 용궁사의 석축 재정비가 2021년 2월에 아름답게 정비되면 대웅전의 모습도 더욱 아름답게 자리 잡을 것이니 한번 방문하셔서 지역의 명소를 눈으로 마음으로 느껴보시기 바란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용궁사 신도 그리고 주민 여러분의 따뜻한 성원은 용궁사를 더욱 아름다운 명소로 만드는 힘이다. 진정한 국제도시로의 부흥을 위해 주민들의 동행을 다시 한 번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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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영종지역의 표상... 터줏대감 조삼성 초대 민선 영종면장의 삶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장   영종도에서 초대 민선 영종면장을 지내신 故조삼성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 분의 손자인 ‘셀 세모세차장 영종국제도시점(전소)’ 조충현 사장을 만났습니다. 우리 고장의 일꾼이셨던 조삼성 초대 면장님의 삶을 통해 공무원과 지방자치의원, 그리고 주민들이 배울 점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조삼성님는 1910년 영종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주권을 빼앗긴 시국이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17세에 면사무소 촉탁직원으로 채용되었고, 독학으로 정식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면서기가 되셨습니다.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 정세가 안정되지 못한 가운데 면단위 지방자치 선거가 실시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시초입니다. 이 분은 주민들의 권유로 초대 민선 면의원 선거에 출마합니다. 특히 이북5도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일했기에 선거기간 동안 이북5도민들이 선두에 서서 열렬히 지지하고 선거운동까지 펼쳐 당선되었습니다.지방자치의 근원이 현재는 시·군·구이지만 당시는 면 단위입니다. 면의회 의장이 면장이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행정력이 남달랐던 조삼성 면장님은 섬마을 시골길을 개설할 때도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주민들과 소통하고 동고동락하며 뜻을 모을 수 있었다고 후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이 평생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셨다는 흔적은 영종공설묘지 공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영종면의회 의장, 초대 민선면장, 영종농협장, 대한노인옹진군지부장, 영종중·고학교 유치, 북도면 전기·전화 유치’... 묘비에는 당신이 걸어온 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생전의 고인을 아셨던 분들은 입을 모아 인품이 훌륭하고 주민과 잘 소통하면서 평생을 공익을 위해 헌신하신 지역의 표상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후배들이 선배의 인생을 아름답게 보고 뒤를 이어가기를 바랄 뿐입니다.조삼성 면장님은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춰야 된다는 지론을 항상 가르쳤다고 합니다. 57년 동안 공직자로서 소임을 다하시고 퇴직할 당시 800만원의 빚을 지고 계셨다고 하니 재물을 탐하지 않은 청렴한 정신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빚을 둘째 아들 조규종씨가 인삼농사를 해서 몇 년에 걸쳐 갚았다고 합니다. 현대의 청년들이 이 분의 정신을 본받는다면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고인은 영종농협장도 역임하셨습니다. 영종농협은 리·통에 있던 조합을 합병하여 면단위 농협을 설립한 것입니다. 조삼성님은 조합장을 맡으면서 자비를 들여 농기계를 구입해 선진농법을 보급하는 등 조합원인 농민들의 소득 향상에도 앞장섰습니다.지금의 인천 중구농협은 축복받은 농협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정부 때 특별법에 의해 단위농협이 설립되었지만 소득 창출은 없고 재무구조가 열악하다보니 보리 수확 때 보리로, 벼농사 수확 후에는 벼로 출자를 받아 겨우 연명하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 때의 현실을 현재 일하고 있는 농협 임직원들이 꼭 알았으면 합니다. 당시 농민조합원의 소득창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비를 쓰셨던 조합장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중구농협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조삼성 면장님은 지방자치 시절 뜻있는 분들과 함께 영종통운을 통해 영종호가 다닐 수 있게 하였습니다. 당시는 만석동에서 구읍뱃터로 하루에 4회 정도 운항하다가 훗날 월미도에서 구읍뱃터로 용주해운 도선이 운항하게 됩니다. 이런 뱃길이 지금의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등이 생기게 된 단초가 되었으며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설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입니다. 또 전기와 전화가 들어오지 않던 1980년 이전에는 초롱불을 밝히고 생활하였습니다. 당시 상공부장관에게 영종·용유·북도면 주민들의 뜻을 강하게 전달하여 한국전력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게다가 중등교육시설이 제대로 없던 시절에 지역의 지인들과 뜻을 모아 학교 설립을 유치하는데도 적극 앞장섰던 분입니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손자 조충현 사장의 기억에 조삼성 할아버지는 늘 근엄하신 분이셨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늘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외출하면 주민들이 할아버지께 다가와 인사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면 어린 나이였지만 주변 분들이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만들어지기까지 수 많은 선배들의 노고가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애쓰셨던 선구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는 없지만 그 업적을 길이길이 기억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이것이 후배로서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선구자들이 남겨주신 이 아름다운 유산을 우리 모두 뜻을 모아 후손들에게 더 나은 모습으로 물려주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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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9-21
  • 애국과 지역사랑의 모범을 보여준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
                    김홍복전 인천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장   길고 길었던 장마와 연이은 태풍이 지나가고 어느덧 절기상 ‘추분’이 되었습니다. 24절기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16번째 절기를 맞은 것입니다. 새삼 시간이 참 빠르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추분에 즈음하여 논밭의 곡식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것을 조선시대 선조에게 배웠듯이 무엇이든지 때가 있고 그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누구의 후손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온고지신(溫故知新)’입니다. 역사는 때가 지나면 알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을 방문해 김명준 종친회장님과 김명식 총무님으로부터 선친들이 걸어온 길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 문중은 조상 김일손의 후손인 김성원 선조께서 1464년 영종도에 입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김성원 선조는 문과·무과에 급제한 분이셨지만 당시 정세가 불안하던 시대여서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다시 충청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으로 들어오셔서 신불도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조분은 세 아들을 낳으셨는데 현재 신불도의 김홍석씨네가 작은집인 셈이고, 삼목도 김진영 공항교회 장로님네가 큰집, 넙디 김흥선씨네 집(중구 문화재 지정)이 김해 김씨 영종문중의 시초입니다.   이후 김해 김씨 영종문중은 지역의 뜻있는 일을 주도하고 동참하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일제시대 때는 독립자금을 대고 보통학교 설립을 주도하는 등 애국 활동을 많이 한 문중입니다. 먼저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써달라며 쌀 3,000석을 내놓았는데 당시는 정미해서 100Kg가 1석 가마니로 유통하던 시절로 현시세로 아주 큰 금액이었습니다. 넙디 김종현 어른의 집이 경제적으로 풍족했기에 선친께서 선뜻 독립자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기에 보통의 애국심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조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후손들도 이어받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일제시대 당시 영종도에 학교가 없어 교육환경이 매우 열악한 시절이었습니다. 이 또한 당시 면장을 역임하신 김달현 어른이 중심이 되어 1920년 9월 22일 전소에 영종공립보통학교를 건립하였습니다. 이 학교가 바로 현재의 영종초등학교와 영종중학교입니다. 영종초등학교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영종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를 건립한 문중의 후손으로서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더불어 영종도의 섬과 섬을 연결하는 돌다리 건설사업도 이 문중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맨 먼저 삼목도를 연결하고, 두 번째로 영종도와 신불도를 연결했고, 세 번째가 영종도에서 용유도를 연결한 것이라고 합니다. 주민들은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웠는데 현재는 문중 사당으로 이전해 놓았습니다.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 종친회는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문중 사당에 모여 시제를 지내고, 정월에는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 문중의 사당은 김홍석 이사의 작은아버지인 김승선씨께서 큰 돈을 후원해 건립하였습니다. 김승선씨는 16세에 일본으로 징용을 끌려가서 모진 고생을 하다가 일본에서 사업을 하셨습니다. 이후 영종 고향에 김지선, 김순선, 김형선, 김예선 형제를 찾아오게 되었고 형제들과 뜻을 모아 사당을 건립한 것입니다. 후손들은 김승선 어른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었습니다. 이 일에는 종친들도 십시일반 후원하며 뜻을 함께 해서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 종친회의 이사는 김동천, 김홍석, 김홍빈, 김홍명, 김동인 등 다수가 맡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열심히 뿌려놓은 씨앗으로 열매를 맺어가는 후손들을 살펴보면 인천대교 김수홍 전 사장과 과천시 총무과장 출신인 김홍흥씨, 현 경기도청 김동수 수산과장과 김귀남 남동경찰서 경감, 중구청 김홍남 농수산과장 등이 있습니다. 또 중구농협 초대 조합장, 옹진수협조합장, 중구 노인회장을 역임하신 故김홍범 조합장이 계시고, 인천시의원과 인천중구청장을 4번 연임하신 김홍섭씨도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 중구의회 의원과 중구농협 조합장, 중구청장까지 역임했던 필자도 문중 사람입니다.송도에서 신비라인 피부과 김홍병 원장, 중구청 김도경 인사팀장, 김동옥 보건과장,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김동환 과장도 모두 같은 문중입니다. 故김홍전 인천일보 전 논설실장님도 계셨습니다.   끝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뜻있는 제안을 드립니다. 김해 김씨 영종문중이 이 지역과 국가를 위해 여러 공헌을 하며 걸어온 길에 LH에서도 함께 뜻을 이어가고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역주민들을 위해 일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오래 전부터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이 지역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름답고 값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역주민들과 관공서, 기업들이 함께 힘을 모아 협력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 칼럼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9-15
  • 무의도 발전을 이끈 인천 중구의회 차석교 초대 의원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변동불거(變動不居: 변하고 움직여 가만히 있지 않는다)   1991년 김영삼 정부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지방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인천 중구의회는 3월27일 선거를 실시하고 4월15일에 개원했고, 인천시의회 선거는 6월에 치러졌습니다. 중구의회에서는 영종동에서 필자와 용유동에서 차석교 의원이 당선됐고, 우리 지역 시의회의원으로는 이세영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이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이 세 사람의 조합을 두고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삼형제’라며 주민들께서 축하해 주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무의대교를 건너 무의도 곳곳을 들러보면서 문득 인천 중구의회가 시작된 1991년 당시 차석교 초대의원님과 함께 했던 의정 활동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당시 지방의회 선거에서 용유동 주민 분포가 용유본동 2,200명과 무의동에 500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무의동에 거주했던 차석교 후보님이 당선되었습니다. 차 의원님은 무의 9통에서 11통까지의 도로 개설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그 당시 무의9통 큰무리에서 11통까지의 도로는 경운기조차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는데 당선되고 차석교 의원이 발의하고 제가 동의함으로써 도로 개설의 단초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자비를 써가며 토지주 189명을 찾아 일일이 소통하고 도로개설을 위해 동분서주 바쁘게 뛰어다니셨던 차석교 의원님의 열정과 노력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특히 차 의원님은 당시 중구의회 의원 13명 전원을 무의도 현장으로 대동해 경운기를 타고 현장을 다니며 도로개설의 당위성을 설명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열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이 근간이 되어 훗날 무의11통에서 소무의도(12통)로 인도교 교량도 놓이게 됩니다. 이때는 차석교 의원님이 수협조합장을 맡으실 때였고 저는 중구청장을 역임하면서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   차석교 의원님은 또 연안부두에서 무의도까지 오가던 ‘관광5호 여객선’이 손님이 줄어 운항을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광객 유치’에 팔을 걷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호룡곡산과 국사봉 등산로 개발을 위해 주민들과 함께 자비를 들여 임야 소유주를 설득하고 중앙 언론을 통한 무의도 관광여행 홍보를 하게 됩니다. 그런 활동이 하나 둘 모여 관광객들이 점점 늘기 시작하고, 주민들이 힘을 모아 ‘실미도 자연발생유원지’와  ‘하나개해수욕장’을 관광지화 하여 지금의 사회적 기업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또 지금은 고인이 되신 무의10통 강충부 전 통장님께서도 힘을 보태주셨기에 하나개해수욕장이 주민의 소득 증대와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실미도 재빼기길을 차석교 의원님이 당시 9,000만원이라는 거액의 자비를 들여 도로를 개설하면서 실미해변이 관광지가 되었고, 현재의 쏠레오 투자회사가 복합리조트 개발계획을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신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관광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덕교8통에서 잠진도길 바다에 폭 10m 도로를 개설하기까지 이세영 시의원과 차석교 구의원, 그리고 저 세 사람이 참 많이 연구도 하고 공무원들도 설득하며 오늘의 도로를 만들어냈고, 그 길이 무의해운 도선사가 운항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됩니다. 그 이후에 박상은 전 국회의원님의 뜻도 더해져서 지금의 무의대교가 탄생되었습니다.   이러한 업적 뒤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1976년 차석교 의원님의 부친이 복통이 생겼지만 저녁에는 육지로 나갈 수 없던 시절이라 다음날 동이 트고 작은 배를 타고 육지로 이송하는 도중에 소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차 의원은 섬 주민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설움과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무의도가 육지가 되어야 하고 육지와 통하는 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차 의원님과 저를 비롯한 기초의회 일꾼들은 그 당시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일례로 중구의회 건축조례를 개정하여 당시 옹진군에 있던 미등기 건축물을 양성화시켜 전부 신규 건축물로 등재할 수 있도록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역 사랑의 뜻이 모여서 무의도가 지금의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관광객 북적이는 현재 무의도의 모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섬 사랑의 씨앗을 뿌려왔던 차석교 의원님의 노력인 것입니다.  무의 잠진도길, 소무의도 연육교, 무의대교 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당시 ‘삼형제’ 이세영 시의원(전 중구청장), 차석교 구의원(전 수협조합장), 김홍복 구의원(전 중구청장/농협조합장)이 심어놓은 씨앗이 오래도록 값진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축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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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9-07
  • 가문의 얼을 이어가는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은 신석기시대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며 3·1운동을 함께 했던 조상의 얼이 살아 숨 쉬는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곳 용유동·을왕동에 위치한 늘목마을에 집성촌을 형성한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문중은 59대에 용유지역에 입향해 늘목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70대손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11대째 이 곳에서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곳에 입향한 59대 정세유 선조분께서는 세 아들을 두셨고 그 아들들의 후손이 지금의 정씨 용유문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에는 당시 큰아들의 후손인 정동선씨, 둘째 아들의 후손 정영철·정영목씨, 셋째 아들의 후손으로는 정의훈(고인)·정성모씨가 계십니다.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 정성모 종친회장님을 만나서 가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67대손인 정성모 회장님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59대 선조분의 셋째 아들 후손으로 이 종친회를 7년째 맡고 계십니다. 종친회를 함께 이끌고 계시는 부회장은 정영철 남북동어촌계장님, 총무는 정종문씨(남북동교회 성도), 고문은 정봉훈 전 농협이사와 정지성 중앙 종친회장님입니다. 참고로 경주 정씨 중앙 종친회는 영등포 대방동에 있으나 앞으로 파주로 이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선조들의 자취를 돌아보면 용유면장을 역임하신 정명환(고인)님이 계셨으며 정성모 현 회장님은 인천광역시에서 부이사관으로 정년퇴임하셨고 정지호 사무관(용유중앙교회 장로)도 계십니다.용유 남북동 옛 용유중학교 옆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있습니다. 당시 13세였던 정영옥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정영옥씨가 여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남성이라고 합니다.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의 종중 선산은 늘목에 산 200평 정도가 있습니다. 매년마다 음력 10월 둘째주 토요일에 친척 30명 정도가 모여 시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경주 정씨 용유문중의 종친회는 1년에 한번 정기회를 하는데 시제날 같이 하고 임시회의는 연말에 하곤 합니다. 또한 종중간 애·경사에는 종친회 명의로 조화나 화환을 보내줍니다. 종중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노력하시는 정성모 회장님의 노고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정 회장님은 자칫 잊혀질 수 있는 가문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전자족보를 도입해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일입니까. 정성모 회장님에 의하면 영종도에도 정씨 문중이 있었지만 578만평 규모의 영종 도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모두 뿔뿔이 흩어져 현재는 그 근황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다만 정기남(고인)씨가 영종문중 종친회장을 역임했던 것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정성모 회장님은 “선조들의 사상과 뜻을 잊지 말고 후대에서 또 후대에게 뿌리 사상을 이어가도록 해야만 하는데 지금의 젊은 후손들이 이 같은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고 말씀하십니다.‘전분세락(轉糞世樂)’이란 말의 뜻처럼 ‘만일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면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지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하라. 만일 두 다리가 부러졌다면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 만일 목이 부러졌다면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를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최악이 아님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살아서 숨 쉴 수 있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걸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젊은 세대들이 왜 이 모양이지 하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나부터, 우리 종중부터 이념과 조상의 얼을 찾아 하나씩 그 뜻을 받들어 가면 그것이 가문의 얼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차근차근 주어진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모여서 큰 성과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비바람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혜의 왕인 솔로몬처럼 정성모 회장님과 경주 정씨 용유문중의 특별한 지혜가 모아져서 서로 격려하고 지역을 사랑하는 종중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종중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중지를 모아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이 뜻깊은 종친회로 계속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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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8-25
  • 삶의 향기가 아름다운 안동 장씨 영종파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긴마루라는 뜻을 가진 ‘영종(永宗)’은 문헌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 자연도로 칭했고 당시 영종도에는 ‘경원정’과 함께 ‘제물사’라는 절도 있었습니다. 제물사는 송나라 사신들이 꼭 방문하는 필수 관광지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곳 영종도 운서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온 안동 장씨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운서리 모랫말 마을을 중심으로 안동·인동 장씨의 후손들이 김포파에서 이곳으로 입향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무의도9통 큰무리 마을에 계시는 장원섭(77세) 종친회장님과 안동 장씨 영종파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의9통 노인회장이신 장원섭 회장님은 12년 전부터 영종파 안동 장씨의 종친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큰아들 장정민(52)씨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며 둘째 아들은 남동구 서창동에 거주하는 장정재(49)씨입니다. 원래 안동 장씨 영종파는 운서4리 모랫말에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회장님의 고조부께서 용유와 을왕리 농토와 무의9통 방죽논 농토 관리를 맡게 되면서 큰무리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집안에는 묘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선조 한분이 지관(묘자리 봐주는 사람)이셨는데 지금의 무의10통과 11통 사이의 임야에 있는 산소를 보고 한곳은 부자가 될 수 있으나 집안이 병치레를 많이 할 터이고, 다른 한자리는 아들만 출산하면서 집안이 평안할 것 같다는 것인데 선조들이 두 번째 자리를 산소로 썼더니 정말 자손들이 아들만 출생했다고 합니다. 고전에서나 읽을 법한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미풍양속에서 나오는 생활풍토로 믿어집니다. 그때의 장원섭 회장님의 집안은 지관의 얘기대로 아들만이 번창하는 집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동 장씨의 영종파 내력은 34대째이지만 영종의 내력은 21대에 영종으로 유입되었다고 기록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3대 정도가 영종파의 종중들이 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터전을 일구어 갔다고 보여집니다. 안동 서호면에 안동 장씨 시제를 지금도 그 곳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니 아마도 본 안동 장씨의 뿌리는 그 곳에서 출발했다고 봅니다. 영종파 안동 장씨의 종친회 모임조직 형태는 회장, 고문, 부회장, 총무, 이사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종중 모임입니다. 장명수(80) 부회장님은 운서동 공항신도시에 거주하시고, 장태동(68) 총무님은 모랫말 출신이면서 시내 거주하고, 장성수(68)·장경동 이사님 등 종중의 뜻있는 분들이 함께 종친회와 연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문은 모랫말 출신 장갑동씨가 맡고 있습니다. 영종이 섬으로 있을 당시 영종통운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2008년 영종도에서 578만평 토지보상 문제로 안동 장씨의 선산과 납골묘, 산소 등이 수용이 되면서 받은 보상금으로 지금의 하늘도시 운서지구에 3층 건물을 지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종친회를 운영하신다고 합니다. 월세를 모아 1억원 정도를 장학금으로 만들어 종중 자손들에게 장학사업도 계획하고 있고, 종친회 건물은 앞으로 쉼터를 만들어 시내에 거주하는 종친들이 고향을 찾았을 때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한다고 하시니 이것 또한 애향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영종에 입향한 21대 장서운 선친은 임진왜란 당시에 이곳에 입향하셔서 신입장군 종사관이라는 관직도 역임하셨는데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서 전사하여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22대는 명예직이지만 가선대부의 직함을 종중의 어른 역할을 했던 기록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33대 장익환씨는 교장선생님으로 지역에서 교육봉사 활동을 많이 하셨다고 전해집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은 생의 끝자락에 있다고 했나요. “우리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다음 세대가 이 가풍을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영종파 안동 장씨라는 자손임을 자랑해야 할텐데...” 하는 회장님의 말씀 속에 뿌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영종·용유 애향가족들이 가치관을 가지고 종중의 반듯한 사랑을 자손들이 이어갈 그날은 우리 모두가 행복한 나날들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왕 솔로몬에게 무엇을 가장 원하는냐고 묻자 그는 지혜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선조들의 지혜를 우리가 보고 배웠듯이 사회생활에 접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얼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인생의 승패는 얼굴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항상 웃으면서 편안한 얼굴 이것이 우리 선친들이 지킨 가풍이라는 종친들의 말처럼 항시 행복한 사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그런 소중한 영종파 안동 장씨의 가풍을 이어가는 자손들이 되기를 축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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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8-18
  • 개발도상국에 영농기법 전수하는 실미원 영농법인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인천 중구 무의동 433번지 실미해수욕장 입구에 실미원 영농법인을 찾아 신순규 대표와 담소를 나누면서 진실한 농심(農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농사짓는 것이 어려운 일로 모두가 기피하고 있지만 식량이 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식량안보를 위해서라도 우리 농업의 맥을 이어가야 할 중요한 사업입니다.   현대의 영농은 다른 산업분야와 마찬가지로 선조들의 지혜에 기술이 더해져 과학영농으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선진 영농기술로 우리 농업을 발전시키는 영농후계자가 바로 실미원 신순규 대표입니다. 옥수수는 토양성분 정화용으로 심는다는 과학영농과 고추농사도 남들이 1개를 수확할 때 이 분은 3개를 수확할 수 있다는 농업기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친환경 농법 중 고추를 심고 사이사이에 옥수수를 심어 해충을 옥수수에 모여들게 한다는 지혜를 들으며 몰랐던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별이 있기 때문이란 말처럼 이런 농민이 있기에 우리 농촌이 살아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값진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곳 실미원 농장은 신순규 대표와 부인 장명숙씨, 아들 내외가 함께 지내며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들 신지용씨와 며느리 최은숙씨 부부는 농수산대학 학내 커플로 전공을 살려 영농법인을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부는 요즘 보기 드물게 다자녀를 둔 가정으로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공항중학교 1학년인 신기훈, 용유초 무의분교 4학년인 영주, 3학년인 영은, 다섯 살인 영선, 세 살인 기영 5남매와 함께 3대가 모여 사는 모습에서 한없는 행복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공익적 차원의 목표가 뚜렷해야 농업을 할 수 있다’는 신순규 대표는 1988년 농업 경영인이 되었고, 2005년에는 ‘농업 신지식인’으로 선정돼 포도를 주로하고 다른 작물도 재배하는 복합영농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네팔, 에디오피아, 키에르키스탄 등 개발도상국에서 우리나라에 농업 교육을 받으러 온 외국인들에게 5년째 영농교육을 하고 계십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예년처럼 교육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벌써 세 차례에 걸쳐 150명의 교육생을 배출했다고 합니다. 이 영농교육은 서울시가 교육비를 전액 지원해 개발도상국 농민들에게 친환경 농법을 전수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한번 교육할 때 정원이 20명 정도인데 40~50명까지도 지원자가 몰린다고 합니다.    신 대표는 농수산대학에서 현장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농업의 선구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매뉴얼 교육만이 아닌 실물 중시의 자연농법을 가르친다고 이야기 합니다.  개발도상국 산업체 요원이 휴일이면 이곳을 찾아 농촌 일손 돕기도 하고 친환경 농업기술도 배우겠다고 찾는다고 하니 한국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앞선 농법을 개발도상국 농민들에게 전수하는 실미원 신순규 대표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며 참 좋은 농심(農心)을 전하는 행동에 존경을 표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듭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농심을 가지고 계신 농업인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도 더해집니다. 식량 무기화 시대에 돌입한 현재 인천시의 농업 행정이 과연 선진농업을 지향하고 있는지 농업인으로서 묻고 싶어집니다. 실미원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농업교육을 서울시가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인천시와 인천 중구의 농업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일월영측(日月盈?)’ 즉 해와 달은 차면 기운다고 합니다. 농업과 농촌이 살아야 지역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행정관청의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이 그 위치에 있으면서 주민들의 편에서 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진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 칼럼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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