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9-28(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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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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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목회단상> 뽑고 심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
    한 청년이 수도사의 길을 걷기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장은 그에게 권총 한 자루를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 생활이 답답하면 공중을 향해 한 방씩 쏘면서 마음을 푸십시오.” 그는 답답해질 때마다 수도원 뒷산으로 올라가 권총을 쏘면서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권총으로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수도원장실로 갔지만 원장은 없었습니다. “원장님이 어디 계실까요?” “아마 뒷산 너머에 계실 겁니다.” 뒷산 너머로 수도원장을 찾아간 그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따다다다따다다….” 하늘을 향해 기관총을 쏘고 있는 수도원장을 봤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 국내외 정세, 물가상승과 고금리, 환율상승 등에 따른 답답하고 염려스러운 마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이 필요합니다. 평안한 마음을 위한 조언은 많습니다. ‘좋았던 일들을 기억하라’ ‘긍정적으로 말하라’ ‘봉사하라’ ‘바쁘게 살라’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잠시 잠깐의 감정 진통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마음 속의 답답한 감정, 불안한 감정, 염려와 두려움의 감정, 분노의 감정 등이 뽑힙니다. 대신 평안함과 담대함이 마음에 심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안에서 뽑고 심는 일을 합니다. “나의 말씀을 네 안에 두라. 그러면 그 말씀이 파괴하고 뽑고 심고 건설할 것이다” (렘1:10). 종종 뉴스에서 검거된 흉악범 사이코패스의 얼굴을 공개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전혀 흉악범처럼 보이지 않고 너무나 평범할 때, 우리는 놀랍니다. 어떤 범죄심리학자는 사이코패스를 ‘정장 차림의 뱀’으로 비유했습니다. 세상에는 정장 차림의 뱀이 많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정장 차림과 같은 외모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뱀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외모에만 관심을 두기보다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운전자가 누군가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집니다. 술을 마신 사람이 운전대를 잡으면 아무리 좋은 차라도 비틀거리고 사고를 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려지면 뱀과 같이 인생을 망치는 나쁜 성품, 나쁜 습관, 나쁜 감정 등이 뽑힙니다. 대신 말씀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안내합니다. 우리 교회는 전교인이 성경통독 200독을 목표로 하여 읽고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더욱 깊게, 그리고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읽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뽑을 것은 뽑고, 심을 것은 심어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시고,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꾸어 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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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1
  • 인생은 스토리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와 아이클 고힌이 함께 기록한 <세계관은 이야기이다> <성경은 드라마다> 라는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제목만 보면 드라마처럼 쉽고 재미있을 것 같지만, 철학으로 분류되는 세계관 서적이라서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책의 제목이 그 내용을 한 문장으로 쉽고 명쾌하게 요약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성경은 암호 코드로 된 책이 아니라, 메타 네러티브(=큰 이야기)로서 분명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세상과 인류의 기원과 끝, 그리고 끝 너머의 영원을 담은 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스토리의 작가이면서 연출가입니다. 성경 스토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 스토리는 개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큰 이야기입니다. 삶의 이야기이기에 공감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내 삶의 이야기, 곧 나의 과거, 현재, 미래, 나의 꿈, 내가 가야 할 길... 나의 스토리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지난 금요기도회 시간에 80년대를 풍미했던 포크송 그룹 해바라기의 멤버였던 분을 모시고 <미션 해바라기> 집회를 했습니다. 1부에는 히트곡을 불렀고, 2부에는 찬양 간증을 했습니다. 예배당에서 가요를 불러도 되나?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찬양과 간증은 삶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일(그 스토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의 삶의 스토리에서 노래는 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분들만의 독특한 하나님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 스토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구원’이라고 하는 보다 큰 이야기, 메타 네러티브의 한 부분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가수 김종찬 씨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는 제 세대의 토요일 밤을 불태우는(?) 기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스토리도 없이 특송으로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부른다면 누가 받아줄까요. 그러나 이 노래가 김종찬 목사님의 간증 속의 한 부분이 된다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공감, 그것은 스토리의 힘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1-2) 유명한 성경 구절입니다. 이 시편을 노랫말로 우린 찬양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제목을 보면,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도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게 된 다윗의 스토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힘이 됩니다. 그게 스토리의 힘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오늘 힘든 일이 있습니까? 가슴에 멍이 들고,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까? 나이가 들고, 몸도 마음도 쇠약하여 가는데, 내 인생은 그리다 만 그림같이 초라하다고 생각되십니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십시오. 더욱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고난도 눈물도 나만의 스토리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스토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작은 몸짓 하나, 흘린 눈물 한 방울까지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스토리의 결론을 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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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
    마음이 답답하여 가평에 있는 필그림 수양관에서 하루를 머물다 왔습니다. 단 하루이지만 꿀 같은 안식의 시간이었습니다. 산속 공기가 좋았고, 천로역정 코스로 꾸며 놓은 산책로도 흥미로웠습니다. 오랜만에 주님만 바라보고 명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침묵 기도를 하는 곳이어서 잠시 졸음과 싸우느라 힘들었지만, 고요한 중에 주님을 대하는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고요하다가 한 번씩 강하게 임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참 행복했습니다. 무언가를 달라며 졸라댄 것도 아닙니다. 거저 주님 바라보며 앉아 있을 뿐이었는데 주님은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선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동화책같이 권선징악이 뚜렷하지도 않고, 내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때론 주님이 내가 원치 않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실 때도 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는 답답합니다. 그래도 주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더욱 주님 손 꼭 붙잡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설탕이나 버터는 달기는 하지만 건강에 썩 좋지 않습니다. 소금은 짜서 싫습니다. 베이킹파우더도 그냥 먹기 힘듭니다. 밀가루는 호불호가 갈립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합쳐서 구웠더니 맛있는 과자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이렇게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하나 보면 거친 것입니다. 호불호가 갈립니다. 그러나 모두 합치면 과자가 됩니다. 낱개로 보면 싫은 것도 하나님이 합력하시면 유익한 것이 됩니다. 고난은 쉽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큽니다. 그리고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이것을 믿는 신앙을 ‘섭리 신앙’이라고 합니다. 섭리 신앙으로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까지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에펠탑을 건립할 당시, 파리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모파상을 비롯한 많은 지성인이 무척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탑이 완공된 후 모파상은 매일 에펠탑 카페에 올라가 차를 마시고 글을 썼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그렇게 이 탑의 건립을 반대하고 싫어하던 당신이 어떻게 이 탑을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모파상은 "탑에 들어와 앉아 있으면 이 탑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모순된 일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비판과 반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절차를 거쳐 일의 방향이 결정되면 비판 대신 협력을 통한 상생의 기쁨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공동체는 성숙과 발전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교회의 일도, 국가의 일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이 나라도 보다 성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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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4
  • 하계 부흥회를 앞두고
    2020년 2월 입당 예배 이후에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상은 급속히 변했습니다. 행복한 변화가 아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교회에 불어닥친 변화의 현실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예배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교회의 정의는 ‘에클레시아’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예배도 모임이고, 모여야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더욱 힘써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언택트 시대, 모이는 것을 미덕이 아니라, 민폐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모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온라인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신학적 정당성에 대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미 온라인 예배와 모임 등은 포기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는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기술로 언택트 상황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은 교회들은 그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인의 수가 감소하고, 일부는 문을 닫았습니다. 아직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조금만 견디자’ 하는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시간아, 흘러라. 조금만 견디자’ 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가장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으로 활용했습니다. 예배는 현장과 온라인 양쪽 모두 은혜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멘토링 양육, 제자훈련 등을 통하여 신앙을 내면화하며, 리더를 세우고 공동체의 성숙과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교인 숫자도 급속히 늘고 있습니다. 팬데믹 시대에 우리처럼 성장하는 교회는 드물 것 같습니다. 제자훈련 시간에 성도님들께서 바쁘게 달려온 저에게 안식년을 제안하였습니다. 참 감사하고, 뭉클했습니다. 그 따뜻한 배려는 이미 저의 마음에 안식과 재충전을 주었습니다. 가속을 받아서 달려야 하는 시기에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습니다. 대신 착한 양 떼를 위해서 아프지 않고 더욱 잘해야지 다짐해 봅니다. 교회도 이 시점에서 본질을 점검하고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할 때입니다. 하계 부흥회 주제가 “리부트하라!”입니다. 리부트(Reboot)란 본질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새롭게 하는 시작을 말합니다. 재부팅을 위해 먼저 on을 off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3일간 개인적인 시간을 off 합시다. 약속은 뒤로 미루고 예배에 참여합시다. 그것이 리부트를 위한 off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결단이 필요합니다. 복음 리부트 (강사: 김용의 선교사, 8/10 수, 저녁 7시 30분) 교회 리부트 (강사: 박건 목사, 8/11 목, 저녁 7시 30분) 기도 리부트 (강사: 이강목 목사, 8/12 금, 저녁 7시 30분) 참여한 모든 분의 삶에 하나님의 행하시는 은혜로운 일들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부흥하는 우리 교회가 더욱 은혜로운 사역을 열어가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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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 고통과 탄식이 가득한 현실 앞에서
    어느 초등학생이 쓴 시라고 합니다. 제목 <개 팔자 상팔자>, “개 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가만히 있어도 때가 되면 밥을 주고/똥 싸면 똥도 치워주고/산책도 시켜 주고/자기 마음대로 낮잠도 자고/무엇보다 숙제를 안 해도 된다/다음 생에는 좋은 주인 만나/개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린아이가 무엇이 그렇게 힘들어서 개 팔자가 다 부러웠을까요. 아이들이 그렇다면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사는 성인들은 얼마나 힘들고 버겁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찬송가 515장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고.” 세상이 점점 발전되고 있다고 하지만 인류는 오히려 세상을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정신적인 혼란, 극한 피로, 생존을 위한 전쟁과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수많은 영상매체와 온라인을 통해 파고드는 불필요하고 거짓된 정보의 홍수는 영적인 영역까지 침몰시키려 합니다. 인생이 전쟁이 되고 고통이 되는 데는 많은 원인이 있을 겁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행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삶에서 밀어내고 나면, 결국 자신이 주인 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위하고, 자신의 만족과 욕심을 채우며 살기에 급급합니다. 어떻게든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내가 가지려 하고, 내가 좌지우지하려 합니다. 거기서 모든 문제와 다툼, 불행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쉼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현실 속에서 함께 하십니다. 나의 열심과 최선을 수단으로 삼고 선을 이루십니다. 때로는 그런 수단 없이도 우연을 가장하여 선을 이루기도 하시며, 그런 수단을 초월하는 기적으로 선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나의 실수와 악하고 불의한 일들을 거슬러 선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힘든 중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는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를 향한 놀라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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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7-27
  • 목회단상 > 믿음의 사람이여 희망을 품어라!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밝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고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현실주의자라고 합니다. 현실의 높은 벽에 절망하며, 세상이 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조차 의심하고 게을리하는 사람을 회의주의자, 허무주의자, 염세주의자라고 합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많이 경험할수록 이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세계는 한때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며 머잖아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1, 2차 세계 대전과 경제 대공황을 겪으면서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러면서 회의주의자, 허무주의자들이 많아졌습니다. 20세기 후반 경제발전과 세계화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인간의 교만은 머리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사상적 배후에는 포스터 모던이라는 사조가 있는데, 이 사조의 뿌리는 철저한 인본주의입니다. 절대 진리, 절대자, 절대 규범 이런 것을 부정하며,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자유 인권의 미명하에 권위와 규범을 해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교만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다시 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보려고 하는 열심조차도 소용없는 오늘,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다시 회의주의, 허무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이런 부정적인 현상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속속 포기하고 있습니다.   옛날 6.25 전쟁의 폐허 더미 속에서도, 사람들은 천막 교회에 나아와서 기도하며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그 어려운 시절을 극복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었고, 신앙은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러나 2022년의 세상은 교회를 희망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향한 온갖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전과 같이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조심스럽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상황은 6.25 전쟁 이후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어버렸던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절망하고 포기해야 합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성경에는 언제나 희망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 곧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린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고, 그가 상 주심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희망 가득한 꿈을 그리고 기도하며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희망이 이 땅의 모든 성도의 얼굴과 삶의 태도로 나타난다면 교회는 다시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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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0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7-13
  • 목회단상> 생각하지 못한 은총이 있다.
    수십 년을 교회 섬겼으나 경제생활은 가난한 집사님이 있었다. 시골 노모가 10년간 모은 돈 400만 원을 사업자금 하라 보내주셨다. 사업자금으로 쓰려 했으나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남에게 진 빚 갚았다. 그리고 퇴원비 없어 퇴원 못 한 성도를 위해 구제비 모금함에 선뜻 내놓았다. 이렇게 귀한 돈 다 쓰이고 말았다.  그 주일날 부유한 집사님과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시간에 가난한 집사님은 부자 집사님 보고 서러워서 울고 부유한 집사님은 감사해서 울었다. 예배 후 부자 집사님이 가난한 집사님 손잡고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4천만 원 되는 가게 하나 전세로 얻는 것인데 동업자는 2천만 원 준비했으나 자신은 돈 없어 준비 못 했다고 말했다. 언제라도 형편 되면 갚으라며 그 자리에서 돈 빌려 드릴 테니 사업하라고 2천만 원을 주었다. 실로 가난한 그에게는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게 산다 해도 주님의 말씀 따라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진실을 다 아시고 누구의 맘이라도 감동시켜 당신의 자녀들을 돕는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갖고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 어디서나 축복하신다. 사람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신다면 생각하지 못한 은총을 마련하신다. (고훈 목사님의 ‘목회일기’ 중에서 발췌)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 한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저 2장 9절 (새번역성경) 그렇게 저렇게 벌써 2022년 하프 타임에 다가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맥추감사절 예배로 떡도 하고 잔치를 했지만, 코로나 팬데믹 2년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위드 코로나’ 또는 ‘엔데믹’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방역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친 분도 계시겠지만, 분명한 주님의 음성이 마음에 또렷이 들려 옵니다. “그래도 감사하자!” “우짜든지 감사하자!”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은혜~은혜이다. 믿음으로 감사할 때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총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7-06
  • 목회단상>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
    “꽃이 이렇게 곱게 피어 있는데 / 꽃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 우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꽃의 아름다움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하는 말이겠죠. 한 송이 꽃을 보고 노래하는 작가나, 붓을 드는 화가가 느끼는 감동은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꽃이 견뎌내야만 했던 인고의 시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살아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우리는 무언가를 당연히 여기고 고마움을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적인 것의 소중함을 생각지 못합니다. 만일 ‘당연하게 여겼던 소중한 것’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누구나 몇 가지는 떠오를 겁니다. 문제는 그 일상적인 것과 당연히 여겼던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점은 그것을 잃고 난 뒤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사람이 떠난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기에 십상입니다. 때늦은 후회라고나 할까요. 당연히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금요일 오후 긴급 기도요청 문자를 받았습니다. 오랜 친구 목사의 사모님이 수술 중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친구는 지금까지 시골교회를 목회하며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진실하고 성실한 목회자이지만, 타협이나 융통성이 없다 보니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아 사역지를 옮겨야 하는 아픔을 몇 번이나 겪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 몸이 약한 사모님이 겪는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가 컸나 봅니다. 목사님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새벽 1시면 일어나 기도합니다. 집에서 새벽까지 잠자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사모님이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그렇게 죄스러웠나 봅니다. 건강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건강검진 받는 시간이 아까워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모님도 암 3기가 지날 때까지 불편하셨겠지만 병원 한 번 가보지 않고,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로 가서 급하게 수술 했다고 하니, 그간의 고생에 마음이 저립니다.   토요일에야 연락이 닿아 통화를 하니, 늦게까지 수술을 마치고 경과를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전화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당연히 여겼음을 회개하며 치유를 구할 때, 저도 친구도 목이 메고 코끝이 시렸습니다. 친구 목사도 이제는 살아서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정말 소중히 여기며 살겠다고 말합니다. 친구야! 꽃이 이렇게 곱게 피었는데, 한 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어디를 그렇게 빨리 달려갔었나! 그렇게 말하고 보니 꽃을 보지도 않고 어딘가로 막 달려가고 있는 또 한 사람이 낯이 익습니다. 잘 보세요.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 소중한 것을 당연히 여기다가 떠난 후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 모두 다 소중합니다. 곁에 있어 더욱 소중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소중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6-29
  • 목회단상 > 신앙생활은 관계입니다.
    신앙생활은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자신과의 관계이고, 그다음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들이 좋으면 삶이 풍성해지며 행복합니다. 반대로 관계가 좋지 못하면 삶은 힘들고 불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어린 생물들은 다 귀엽습니다. 강아지도 병아리도 예쁩니다.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어린아이 때의 모습은 예쁩니다. 그래서 사회는 특별히 아이들을 배려하고 보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습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란 “주여, 저는 연약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는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세리는 감히 고개를 못 들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세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고개를 들고 “저는 나쁜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다 잘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니 잘났다.”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세리와 같은 자세로 설 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세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 ‘의(헬, 디카이오스)’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보호받고, 은혜를 입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자신과의 관계가 좋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죄책감과 열등감, 자학, 자기 연민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자신과의 좋은 관계를 훼손합니다. 자신을 용서치 못하고 하찮게 여기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모습은 정확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도 정확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나, 하나님이 보시는 자신의 모습이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보배롭고 존귀한 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웃과 좋은 관계 속에 살아야 삶이 풍성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가는 곳마다 싸움닭처럼 다투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투며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다투며 많은 봉사를 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좋은 열매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을까요? 빌립보서 2:3 말씀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면 됩니다. 또 한 가지, 인색하지 않으면 좋은 관계를 맺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고 계산이 밝습니다. 밥값 한 번 안냅니다. 자꾸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를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관계가 좋아지려고 하면 지갑을 열면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과의 좋은 관계 속에서 풍성하고 행복한 신앙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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