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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개는 입으로 말을 못 합니다. 그래서인지 개는 사람에게 눈으로 말합니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새까맣고 큰 눈으로 주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반가움을 표합니다. 식사 때면 발치에 앉아 눈으로 ‘뭐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물론 식탁 밑 그 눈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집에서 나 혼자인 것 같기는 하지만요. 동물과도 눈으로 무언의 대화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데, 사람 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눈으로 말해요.?살짝이 말해요.?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눈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단둘이서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눈빛으로 전 세계를 울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사나 사진에 수여하는 퓰리처상이 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인물의 눈망울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큰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지선 교수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간증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대학생 시절 교통사고로 몸의 55%를 3도 화상을 입고, 40번의 대수술을 거치고서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한 화상으로 얼굴은 다 녹아내리고, 양손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은 다 절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굳이 다시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녀의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게 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눈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고 후 병원으로 옮겨져 화상 수술을 받고, 얼굴을 돌돌 감고 있던 붕대를 처음 풀던 날의 경험을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얼굴을 본 엄마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어요.”?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여전했다는 것. 한 존재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얼마나 그 존재에게 안정감을 주고 자존감을 부여하는지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은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집에 누워 있는데, 부인이 빨래를 개라고 시켰답니다. 자신은 암 환자니까 이제 그런 일을 안 시킬 줄 알았답니다.?‘나 환자잖아~’?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산더미 같은 빨래를 자기 앞에 밀어주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뛰어가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아이는 호들갑 떠는 부모를 보는 순간 울음보가 터집니다. 그러나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면, 자기도 대수롭지 않은 듯 스스로 털고 일어난다고 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약하고 서툰 못난 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안정감은 나를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입니다. 그 눈빛을 느껴본 사람은 편해집니다. 그 안정감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잔잔히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빛입니다. 여러분, 느끼십니까! 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찬양을 불러보세요.?“하나님,?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그 사랑의 눈빛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면, 자녀는 안정감을 가지고 꿈을 향하여 도전할 것입니다. 그 눈빛으로 교인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안정감을 가지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눈빛만 보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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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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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목회단상> 부활절, 꽃 이야기
    주중에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한동대 교직원인데 우연히 인터넷 기사에서 故 김영길 총장님에 관련된 목회 단상을 읽고 감사의 전화를 주신 것입니다. 총장님 사모님도 크게 기뻐하시리라며 통화 내용과 글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글재주가 없어 매주 ‘목회단상’ 때문에 ‘목회 힘들다’며 투덜거렸는데, 뜻밖의 전화에 잠시 격려가 되었습니다. 격려 때문인지, 부활절 글 소재가 정해졌기 때문인지, 내일 맞이할 VIP들을 향한 기대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울리지 않게 꽃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1.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이집트 피라미드 발굴 중에 꽃을 손에 쥔 미라를 발견했습니다. 외부의 공기와 접촉하는 순간, 꽃은 산산이 부서지고 꽃씨만 남았습니다. 삼천 년이 넘은 그 씨를 영국으로 가져와서 심었는데 싹이 트고 줄기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 꽃의 이름을 식물학자 이름을 따서 ‘다알’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다알리아’라고 부르는 꽃입니다. 생명 있는 씨앗은 언젠가 다시 꽃으로 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보이지 않아도 아름답게 다시 태어날 수 있기에 ‘다알리아’는 부활을 연상케 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것들이 있습니다. 재산, 권력, 명예, 그런 것은 생명이 없기에 붙들고 집착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내 안에 부활의 씨앗이 있다면 언젠가는 어둠을 떨치고 영원히 아름다운 꽃으로 피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 부활의 씨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26) #2. “죽은 자에게 바칠 꽃을 들고 서 있는데 / 벌이 날아와 앉네” ‘조문’이라는 시의 한 부분입니다. 인연을 맺어왔던 이의 죽음 앞에서 숙연히 조문 순서를 기다리는데, 생뚱맞게 벌 한 마리가 날아와 꽃향기를 탐한다는 내용입니다. 꺾여진 한 송이 꽃조차도 누군가 위로하며, 또 다른 생명을 부르는데, 과연 내 삶의 의미를 알고, 목적에 맞는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세상에 와서 살 만큼 살다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 속에는 삶은 우연의 연속이고, 그 우연들을 연결하는 뚜렷한 목적이나 일관된 서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삶이 ‘창조-타락-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뚜렷한 계획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인생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여 가는 여정입니다. 만나는 모든 일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관된 서사(섭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 풍파나 삶의 부조리 앞에서, 답답한 시간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부르시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 찾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세상이 불안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서 길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누구의 인생이든 죽은 자 앞에 바쳐진 한 송이 국화와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연한 존재가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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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5
  • 코이의 법칙
    일본 어종으로 ‘코이’란 물고기가 있습니다. 관상용 비단잉어의 일종으로 알려진 이 물고기는 넣어 키우는 어항의 크기에 따라 자라나는 크기가 달라지는 특이한 품종입니다. 좁은 어항에 넣어 기르면 기껏해야 10㎝ 정도 피라미가 되고, 연못에서 기르면 30㎝ 정도까지 자라며, 강에 방류하여 자연 상태로 두면 1m 이상 큰 물고기로 자랍니다. 이 현상을 사람에게 적용하여 ‘코이의 법칙’이라 합니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은 어항 안에 있는 사람, 연못 안에 있는 사람, 드넓은 강물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품고 있는 품의 크기가 그 사람됨의 크기가 된다는 ‘법칙’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니, ‘맹모삼천지교’니 하는 말들도 다 ‘코이의 법칙’의 범주 안에 있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법칙’이라고 하니까 거의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영역에도 이 법칙은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1) 믿음은 좁은 어항에서 나와, 넓고 넓은 하나님 품으로 옮기는 결단입니다. 아브람은 고향을 떠나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아버지 야곱의 좁은 품 안에만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좁은 어항에서 꺼집어 내어 넓고 넓은 세상으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품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고통 중에 태어난 아들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야베스(=고통이란 뜻)’라 불렀습니다. 그의 이름은 “고통”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고통’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출생부터 ‘고통’의 굴레에 씌워졌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 시대 사람 중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야베스는 기도로 고통의 어항을 깨뜨렸습니다. 요셉도 원망과 분노의 어항, 복수의 어항, 체념의 어항 속에서 갇혀 살지 않았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믿음으로 그를 둘러싼 담장을 허물었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49:22) 지금도 하나님은 좁은 한계 속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이란 자신이 갇혀 있는 어항에서 하나님이 예비한 넓은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어항을 깨는 사람, 담을 넘는 사람, 광야와 사막을 넘어 하나님이 보여 주실 길과 강으로 가는 사람.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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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6-04-01
  • 목회단상> 신트로피 드라마 (Syntropy Drama)
    <신트로피 드라마>는 한동대 설립자이며 초대 총장이었던 고 김영길 총장의 저서입니다. 무신론 과학자였던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일생을 던져서 한동대를 세우는 과정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감출 수가 없었기에 그분을 전하고 높였습니다. 방법은 세상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변혁할 인재를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공부해서 남주자!” “Why Not Change The World?”는 한동대의 모토입니다. 멋진 학교입니다. <신트로피 드라마>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을 개인의 생애에 적용한 간증이기도 합니다. 신트로피(Syntropy)란 엔트로피(Entropy)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먼저 엔트로피(Entropy)란 지식 백과사전에 의하면, 자연 물질이 변형되어 다시 원래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어떤 물질이 갖는 에너지를 사용함으로 결국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손실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땔감을 태우면 재가 되어 다시 땔감으로 재생할 수 없는 원리입니다. 반면 신트로피(Syntropy)란 사용함으로 무질서한 물질의 에너지를 오히려 질서있게 수렴한다는 의미입니다. 타락에서 벗어나 창조 질서 속에서 영적, 도덕적으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탕이나 소금이 다른 사물에 녹아들어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듯이, 사람도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세상과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변화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드라마가 <신트로피 드라마>입니다. 고인은 미항공우주국의 과학자로 승승장구하며 고생을 몰랐던 삶이었습니다. 그는 과학자의 상식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한동대학이라는 학교를 설립하며 생에 경험하지 못하였던 고난들을 만나게 됩니다. 무수한 사람들 앞에서 생물학적 진화론을 부인하고 창조론을 외치는 자리에 서게 하신 이야기, 한동대 총장 시절 감옥에 간 이야기,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모습들이 드라마틱한 감동을 줍니다. 자신의 영혼을 갈고, 삶을 불태워 넣는 과정을 통해 명문 한동대가 세워지고, 그 학교를 통해 교육받은 귀한 인재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책에서 말하는 <신트로피 드라마>입니다. 필자의 장남도 한동대의 신트로피 드라마의 수혜자이며 앞으로 그 드라마를 이어갈 주역이기도 합니다. 성경 속 믿음의 인물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신트로피 드라마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노예 생활,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고, 세상을 기근에서 구하였습니다. 결국 요셉의 삶도 하나님의 신트로피 드라마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십자가 희생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신트로피 드라마입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트로피 드라마가 삶의 전 영역에서 펼쳐지길 기대합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낸 이야기를 담은 신트로피 드라마를 통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질서가 지속적으로 바로 세워지기를 기대합니다. 곧 있을 새생명 축제도 우리의 섬김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신트로피 드라마가 펼쳐지길 기대해 봅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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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5
  • ‘노가다’ 단상
    우리 교회 증축 공사를 마무리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선교지의 필요를 채우도록 감동을 주셨습니다. 교회 증축 공사비의 십일조를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낸다 생각하고, 루마니아 글로리아 교회 리모델링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교회 증축을 담당했던 건설사 장로님에게 이 같은 취지를 설명하였더니 흔쾌히 재능 기부를 약속했습니다. 우리 교회 최정예 선발팀과 건설사에서 최정예 공사팀, 그리고 밥팀이 합류하였습니다. 저는 공사 일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 굳이 먼 곳까지 갈 필요가 없었지만, 연합팀의 가교역할을 위해서 부득이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열 시간 훨씬 넘는 비행기 탑승부터가 고단한 노동의 시작이었습니다. 현지에 도착해 보니 선발대로 간 우리 교회 집사님들이 예배당 내부를 이미 다 철거하는 등 많은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건설사 공사팀이 오면 이들에게 나머지 작업을 넘겨주고 짧은 여행 후 귀국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다른 작업조건 속에서 정해진 기간 내에 공사 완료를 위해 귀국 전날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하루 평균 13시간 이상 작업을 한 것 같습니다. 첫날부터, 어두울 때 나가서 어두울 때 들어와 씻고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졌습니다. 시차 적응이 필요 없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중간에 먹는 새참과 밥맛은 꿀맛이었습니다. 자기 돈과 시간 드려 일하면서도 불평 없이, 행복할 수 있구나 ~ ‘은혜’라는 단어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일을 많이 해서 힘들었지만, 일 못하는 저는 춥고 먼지 나는 현장에 서성이며 머무는 것 자체가 고된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신축, 증축 현장에 머무는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공사 현장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수고했던 분들이 알면 웃을 일이지만, 공사가 완료되자 곧 몸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누가 공사 일을 ‘노가다’라고 말했던가? 일의 계획, 재료, 방법, 정해진 시간과 순서가 체계적이고 ‘가다’가 분명했습니다. 현장에서는 숙련된 기술로 일을 잘하시는 분이 가장 멋지고 소중했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일을 잘 해내는 것은 멋지고 귀한 일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일 시작 전에 간절히 기도로! 그리고 공사를 마무리하며 뜨겁게 감사의 예배 인도로! 그것이 나의 할 일! 나도 내 몫은 다 했다~ 고로 나도 멋지고 소중하다! 그렇게 자존감을 지켜냈습니다. 나는 나대로, 선교사님은 선교사님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멋지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각자의 인생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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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6
  • 탐욕은 비우고, 은혜는 채우고, 사랑은 흘러간다.
    서점 베스트셀러 부스에는 돈과 재테크에 관한 책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여 부자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에 걸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돈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는데 돈이 필요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숨 쉬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자가 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사명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사랑을 탐욕이라고 말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는 “탐욕은 하나님에게 얻어야 할 만족을 다른 데서 얻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탐욕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골3:5)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돈과 다른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죄를 범했다고 지적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공급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 때문입니다. 그렇게 탐욕은 하나님의 공급이 자신의 삶을 충분히 채우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비싸고 좋은 것, 더 많은 것, 더 새로운 것들이 있을 때 자신의 욕망이 채워진다고 믿습니다. 때문에 탐욕을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의 꽃을 보라, 하나님이 다 입히시지 않으냐? 공중 나는 새를 보라, 하나님이 먹이시지 않느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안정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탐욕을 버릴 수 있습니다. 돈을 의지하는 이유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자꾸 돈에 집착하게 됩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움켜쥐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내 쓸 것도 부족하니 나누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면 모든 것이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분이심을 알기에 미래에 대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탐심을 이기는 길은 복음을 깊고 풍성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그 무엇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깊고 풍성한 사랑의 부요함을 알기에 우리 단기 선교팀원들이 떠납니다. 시간을 바쳐서, 물질을 바쳐서! 그리고 우리는 모두 기도와 물질로 응원하며 마음을 같이 합니다. 그렇게 탐욕은 비우고, 은혜는 채우고, 사랑이 되어 넓게 멀리 땅의 끝까지 강물이 되어 흘러갑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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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4
  • 목회단상> 성탄 - 왕이 나셨도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직 어린 시절이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부모님이 버킹엄 궁전 야외 정원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손님들은 급히 실내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도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다가 어른들이 모여 있는 방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공손한 질문 세례를 받게 됩니다. 한참 대화가 이어지다가 잠시 조용해진 순간, 엘리자베스는 벽에 걸려 있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성화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부모님이 그러셨는데요, 저분이 진짜 왕이래요.” 엘리자베스의 이 고백은 옳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가장 낮고 연약한 아기로 탄생하셨습니다. 보통 아기들은 살기 위해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를 향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탄생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부릅니다. 언젠가 예수님의 왕권 앞에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은 기쁨과 감사로 자발적으로 엎드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저항할 수 없는 권세 앞에 어쩔 수 없이 무릎 꿇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빌 2:9-11). 오늘 우리는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만 영접했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도 영접했는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맞이해야 하는 성탄은 왕이 나신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놀라운 밤, 하나님은 다윗 같은 왕을 주신다고 오래전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과 평안, 그리고 참 기쁨과 행복, 희망과 회복을 주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에 모신 곳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1950년 12월,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이 있었습니다. 열흘 동안 군인과 피란민 약 20만 명을 남쪽으로 안전하게 옮긴 작전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되는 배가 하나 있습니다. 유류 보급을 위해 정박해 있던 7,600톤급 메러디스 빅토리호였습니다. 선장 레너드 라루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배에 실려 있던 무기와 물자를 모두 바다에 버렸습니다. 대신 1만 4천여 명의 피란민을 태웠습니다. 놀랍게도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모두가 거제도에 도착했고, 그 항해 중 다섯 명의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명분도, 어떤 희생도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가장 높고 귀하신 분이,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을 기뻐합니다. 생명을 주신 왕을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누군가에게 나누려고 합니다. 성탄절,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왕으로 경배하며, 우리를 통해 또 다른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이어지는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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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5-12-22
  • 목회단상> 행복을 나누고 싶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의 목회의 모토가 ‘행복’이 되었습니다. 아마 교회 건축을 시작할 무렵부터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가장 목회에서 힘든 시기였는데, “우짜든지 행복하자” 라고 외치며 어려운 시간을 이겨낸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행복하게 보이니, 교회 전체에 행복의 바이러스가 넘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우짜든지 행복합시다!”로 인사합니다. 사람들은 미래의 행복을 기대하면서 현재의 행복을 잃고 살기 쉽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신33: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요단강도 건너야 하고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해결할 문제가 산적한데, 앞으로 행복해질 사람이 아니라 지금 행복한 사람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앞으로’가 아닌 ‘지금’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행복은 소유나 성취가 아닌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하는 것을 가지거나 원하는 일을 이룰 때 느끼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소중한 행복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인간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행복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관계를 통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모세는 행복했습니다. 우리도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행복합니다. 오랜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생각해주고 연락을 주니 위로와 행복을 느꼈습니다. 말씀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 49:15∼16) 한순간도 잊지 않고 손바닥에 새기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나는 더욱 행복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저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으로 인해 이미 행복한 목회자입니다. 늘 곁에서 사랑으로 서로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성도님들이 있어서 행복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까운 분들이 행복을 잃어버리는 모습에 마음 아플 때가 있습니다. 부디 소유나 성취 때문에 사랑을 잃고 관계가 깨어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해 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무심한 말과 행동 때문에 누군가 아파하는 일이 없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가득한 우리 교회는 행복합니다. 다함이 없는 하나님 사랑으로 공감하며 서로에게 행복을 선물할 수 있는 행복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이 행복을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오늘 ‘행복나눔축제’는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모든 분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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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5-12-03
  • 목회단상> 은혜의 눈으로 보면
    50년 전 사람들에게 생필품은 50여 가지 정도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생필품은 이전에 없었던 스마트폰, 세탁기, 식기세척기, 정수기, 압력밥솥 등 8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많은 것을 가지고도 아직도 불편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감사’보다 ‘불평’이 더 많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은혜’라는 찬양 가사 한구절을 인용해 봅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 한 없는 은혜~” 은혜란 내게 찾아온 어떤 것도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어떤 것이 은혜임을 아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사가 밀려옵니다. 무엇보다 성도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의 감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은혜의 눈으로 보면 세상에 감사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당연할 수 없는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과학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극장이라”라고 말한 것 같이, 세상의 존재 그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지난주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근처 단풍이 유명한 산이 있어 일부러 들렀습니다. 이미 단풍은 지고 실망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을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은혜는 가까운 곳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은혜의 눈으로 보면 조촐한 식사도 하늘의 만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매일 곁에 있는 그 사람들이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가족도 소풍 같은 인생에 외롭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고, 교우들도 선물입니다. 은혜가 임하면 껄끄러웠던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이 들의 꽃보다 풍성한 오곡백과보다 아름답고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 꽃보다 아름다운 서로를 인하여 감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은 감사입니다. 기독교는 사은의 도입니다. 기독교인의 모든 선한 일은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면 은혜 위에 은혜가 강물처럼 임할 것입니다. 다시 마음 속에 새기렵니다. ‘아무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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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5-11-19
  • 가을 야유회 단상 - 소풍 같은 인생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인생은 광야다” 등등, 인생을 빗댄 말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저는 “소풍 같은 인생”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짧은 소풍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싸 주신 도시락을 들고 현실이라는 동산에 오릅니다. 누군가는 두둑한 용돈과 소풍 가방 가득한 도시락과 간식을 가졌고, 누군가는 달걀 한 개뿐입니다. 그러나 도시락의 내용보다 친구와 함께 먹었다는 것이 즐겁습니다. 학교마다 소풍 장소가 다르듯, 모두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아니지만, 소풍은 늘 즐겁고 행복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소풍 가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도시락을 엎지르거나, 꽃을 꺾다 벌에 쏘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아이들은 야바위꾼에게 속아서 용돈을 다 잃기도 합니다. 갑자기 비가 오거나, 친구와 다투기도 합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예기치 않은 시련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며 원망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순간을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비 오는 날, 우리의 인생이 흐려져도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 계십니다. 인생을 소풍처럼 누리려면 감사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의 도시락이 더 좋아 보여서 부러워질 때가 있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도시락을 받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는 인생을 소풍으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소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입니다. 친구가 넘어지면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고, 도시락을 나누어 먹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살길 바라십니다. 혼자 잘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함께 웃고 함께 위로하는 인생을 말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바로 그런 ‘하늘 소풍의 친구들’입니다. 짐을 나누어 지고, 기쁨을 나누며,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인생길이 외롭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바쁘고 마음이 지칠 때, 우리는 소풍의 의미를 잊곤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인생이 ‘성과를 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즐기기보다 버텨내는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누리며 감사와 기쁨으로 하루를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오늘이 힘겹더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백해 봅시다. “주님, 이 길이 소풍이라면, 저는 주님 손 잡고 즐겁게 걸어가겠습니다.” 소풍이 끝나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해가 지고 들판이 어두워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맞이하실 것입니다. “어땠니? 즐거웠니? 친구들과 좋은 시간이었니? 마음껏 웃고 사랑하고 왔니?” 그때 웃으며 대답하고 싶습니다. “네 아버지, 너무 행복했습니다.” 지난 주간, 가을 야유회를 다녀왔습니다. 성막 체험, 임금님 밥상, 가을 호수,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광활한 카페에서의 빵과 커피, 버스 안에서의 장기자랑, 그리고 예기치 못했던 일행의 아픔, 꼭 소풍 같은 인생을 축소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사랑과 감사의 소풍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언젠가 이 소풍이 끝나는 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때 “참 잘 다녀왔구나. 어서 씻고 쉬어라” 는 사랑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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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5
  • 가을의 단상
    목회하면서 김장 열 번 하고 나니 10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세상은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합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란 말도 있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잘 나가는 인생도 언젠가 풀의 꽃처럼 떨어지고 쇠잔할 때가 있음을 알고, 늘 겸손한 삶의 자세를 갖추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6~8) 육체는 풀과 같이 갑자기 시들고, 자랑하던 것들도 오래지 않아 꽃잎처럼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것이 인생이니 육체를 너무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을 기억하시나요. 보통 사람보다 심장이 2배 이상 튼튼한 수영 선수였지만, 심장마비로 57세라는 젊은 나이에 별세했습니다. 다음은 세계적인 패션모델이며 디자이너이자 작가인 ‘크리시다 로드리게스’가 암으로 임종을 앞두고 인터넷에 올린 말입니다. “나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차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병원 휠체어에 앉아 있다.” “내 집엔 디자인이 다양한 옷과 신발, 장신구 등 비싼 물건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병원의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다.” “은행에 아주 많은 돈을 모아 놓았다. 그러나 지금 내 병은 많은 돈으로도 고칠 수 없다.” “내 집은 왕궁처럼 크고 대단한 집이다. 그러나 나는 병원 침대 하나만 의지해 누워 있다.” “나는 특급 호텔을 바꿔가며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 병원을 옮겨 다니며 머물고 있다.” 인생은 결국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미인도 들의 꽃처럼 시들고 마르게 됩니다. 이집트 프톨레이 왕조 최후의 왕비 클레오파트라는 9개 국어를 했다고 합니다.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고 세계 최고 권력자인 남성 2명을 좌지우지했습니다. 그런 그녀도 화려한 침대 위에 독사를 풀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 마를린 먼로도 대통령의 마음까지 훔쳤지만 36세에 꽃처럼 갑자기 사그라져버렸습니다. 무더웠던 여름도 지나고 가을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집니다. 무엇이 중합니까? 무엇으로 그리 바쁘고 여유가 없습니까?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영웅호걸로 한 시대를 풍미해도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세상에서 잊히게 됩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영원한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건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영원한 말씀에 근거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 인생은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인생을 계획하고 세워나가시길 축복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 칼럼
    • 목회단상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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