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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항경제권 활성을 기대하며
    <독자기고>공항경제권 활성을 기대하며   구본환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해임됐다. 공공기관 운영위원회(공운위)는 한 달 정도 심사한 후 결정한다는 것과 달리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일주일 만에 일사천리로 해임을 통보했다. 구본환 사장은 ‘비젼 2030’을 통해 인천공항을 중심으로 공항경제권을 만들어 영종,용유와 인천을 항공도시로 탈바꿈 시키려는 비젼을 제시했다. 또한 임직원들에게는 정부 각 부처의 지시를 받는 수직적 관계 보다 공항에서 같이 근무하는 공동체들의 수평적 의사 결정을 통해 공항을 활성화 시킨다는 것이었는데, 구 사장이 해임됨으로써 이를 완수해야 할 차기 사장의 부담이 클 것이다.     공항경제권 일성은 건강한 지역 공동체 만들기 지원사업을 통해 인천공항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공항이 가까워 질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단체가 아니어도 3명 이상 이고 대표자 1명만 되면 누구나 사업을 할 수 있게 기회의 폭을  넓혀 놓았고 도시와 농촌 어촌이 혼재한 영종.용유.신,시,모도,장봉도와 영흥도 까지 참여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작고 쉬우며 누구나 할 수 있는 낮은 단계 호응도 높은 사업이다   작년에는 중구청과 항공기 정비단지(MRO) 토론회를  개최 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고 올 해는 배준영 국회의원과 윤관석 국회의원을 통해 인천공항공사법 일부개정을 위해 국회와 공사를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특히 윤관석 국회의원이 발의한 인천공항공사법 일부 개정에 항공기 정비단지(MRO)를 정부에서 지원받는 경남 사천은 상공회의소를 주축으로 4개 시군연대와 경남 시장, 군수협의회, 남중권 발전협의회,지역 지방자치단체장, 정치인과 공동 대응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구 사장 해임건으로 소집된 공운위가 열리던 날 국회 에서는 인천공항 공사법 개정심사를 돌연 보류했다.   그만큼 인천공항공사법 개정은 인천공항이 MRO를 통해 공항경제권으로 재도약 할 수 있는 기회이고 명실공히 국제공항의 면모를 갖출수 있는 중요한 법률안이었다. 이 외에도 많은 일을 추진 했으나 구사장 해임으로  불투명 해져 지역주민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사장 공석으로 위기가 닥칠 것이라 우려 했는데 대행으로 임남수 부사장이 바톤을 이어 받았다. 그는 공사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인천공항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국토부는 차제에 임기가 1년여 밖에 남지 않은 사장을 추천하기 보다는 대통령이 약속한 정규직 전환에 대해 코로나19를 감안하여 운영의 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써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사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부사장이 권한 대행이 아닌 사장 지휘봉을 잡고 임직원들과 충분히 숙의하여 노조와 갈등 없이 해결 할 수 있게 맡기는 것도 방법이다. 이는 그동안 실망을 안겨준 취준생과 국제적으로 추락한 인천공항 이미지 쇄신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보여진다.    서양의 시인은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고 했다정규직 전환 사태를 계기로 국토부도 지시 보다는 인천공항공사가 거듭날 수 있도록 공항 근무자들의 수평적 의사결정을 통해 인천공항을 활성화 할 수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항공사와 관련 상주직원들은 그 어느 때 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정상화를 대비해 임남수 사장 대행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인천공항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발휘 하기를 바라며 인천공항을 사랑하는 모임은 9만여 지역주민들과 함께 "힘내시라"고 격려의 박수를 보내 드린다.   인천공항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 유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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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2
  • 어느 60대 부부 이야기
    어느 60대 부부 이야기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만드는 행사가 필연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티격태격 하다가도 부부사이에 자식이라는 에너지 솔루션이 생기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립니다. 이 보물 때문에 부부는 서로 느끼는 감정은 물론 이념도 통일된다는 것은 아주 신기한 일입니다. 어느 작가가 ‘바보들의 소망상자’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 표현은 자식에 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아들을 군대 보낼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모든 엄마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들이 군대 영장을 받고 입대를 며칠 남겨두었을 때 우리 가족은 추억을 만들어 보고자 무의도 호룡곡산으로 등산을 나섰습니다. 산을 올랐다가 거의 내려왔을 때 아들이 다리를 절뚝거렸고 증상은 한쪽 다리가 시큰 거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하고 그것은 의무라고 어렸을 때부터 주지시켰는데 설마 꾀병은 아니겠지 하며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무릎 관절강에 물렁뼈 조각이 움직이다가 어느 부위에 가면 압박을 해서 그런 증세가 발생하는데 이런 상태라면 현역이 아니라 방위로 바꿀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학사일정에 맞춰 입대 기간을 정해놨는데 다시 검사를 받는 것도 그렇고 아들은 현역으로 군대를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의견도 아들과 같았습니다. 그것이 뭐 대수라고 아들의 다리가 저런데 군대를 지금 보내냐며 저는 극구 반대했지만 빨리 군대를 마치고 하던 공부를 빨리 끝내야 한다며 아들은 바로 입대를 결정 하더군요.   가슴이 한없이 무겁고 아팠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다리를 절뚝거리며 배에 올라타고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눈물이 났는지 모릅니다. 아들은 가끔 한차례씩 증세가 있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니 괜찮을 것이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저를 다독이고 제 아빠와 함께 훈련소로 떠났고 당시 식당을 운영했기 때문에 저는 훈련소까지 함께 가지 못하고 멀리 뱃터에서 아들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 달 쯤 지나 훈련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들이 훈련을 잘 받고 있고 마지막 훈련과정으로 야간 행군을 마치면 훈련이 끝나고 부대로 배치 받는다는 연락이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남편은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뚝뚝한 남편이 걱정을 하는 것이 심각해 보여서 알아보니 40킬로쯤 되는 거리를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산을 넘고 하는 고된 훈련이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모의 마음에는 행여나 다리도 성치 않은데 그 무거운 짐을 메고 훈련을 받다가 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근심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2.4Kg으로 세상에 나와서 일년내내 감기를 달고 살고 클 때까지 갖은 병치레를 했던 아이를 생각하니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새벽에 첫배를 타고 의정부 훈련소로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훈련소 조교를 만나 진단서를 보여주고 사정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부대 근처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부대앞으로 오라고 했고, 부랴부랴 과일 한박스를 사서 부대 앞으로 가서 훈련조교를 만났습니다. 진단서를 보여주고 의사 소견을 몇 번이나 설명했습니다. 남편은 “우리 아이 상태가 이러니 행군도중 다리가 아파 걷기 힘들다고 하면 짐이라도 차에 실어주는 도움만 주되 아프다는 호소가 없으면 그냥 걷게 놔두세요. 젊은 청년이 건강하면 쇳덩어리를 짊어지고 뛰어간들 어떻겠냐만 사정이 그러니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염려하는 마음을 전하고 돌아섰습니다.   “조교가 인상도 좋고 착해 보이니 안심이 되지?” 남편은 그렇게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것도 청탁이라고 작은 봉투를 마련했습니다. 그때는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아 20만원을 넣기로 했는데 남편은 저도 모르게 용돈을 털어서 만든 비상금 50만원을 더 넣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25년 동안 월급 한푼 안쓰고 받는 대로 저에게 다 주었는데 그때도 느끼지 못했던 고마움은 큰 감동이었습니다. 그 때 남편에게 느꼈던 감사함과 든든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부대 훈련조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스스로 행군을 마쳤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장성한 아들 모두가 그 어미의 뜨거운 가슴에서 태어남이 새삼 느껴집니다. 이 힘이 바로 대한민국의 바탕이 되는 민초들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고위공직자 자녀의 군대생활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부정이 있었다면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할 일이나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의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나랏일 하시는 분들이 코로나19로 많은 국민들이 힘들어하고 있는 이 시기에 정쟁을 멈추고 힘을 합쳐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민초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공항신도시에서 애독자 장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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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9
  • 영종지역의 표상... 터줏대감 조삼성 초대 민선 영종면장의 삶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장   영종도에서 초대 민선 영종면장을 지내신 故조삼성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 분의 손자인 ‘셀 세모세차장 영종국제도시점(전소)’ 조충현 사장을 만났습니다. 우리 고장의 일꾼이셨던 조삼성 초대 면장님의 삶을 통해 공무원과 지방자치의원, 그리고 주민들이 배울 점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조삼성님는 1910년 영종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주권을 빼앗긴 시국이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17세에 면사무소 촉탁직원으로 채용되었고, 독학으로 정식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면서기가 되셨습니다.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 정세가 안정되지 못한 가운데 면단위 지방자치 선거가 실시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시초입니다. 이 분은 주민들의 권유로 초대 민선 면의원 선거에 출마합니다. 특히 이북5도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일했기에 선거기간 동안 이북5도민들이 선두에 서서 열렬히 지지하고 선거운동까지 펼쳐 당선되었습니다.지방자치의 근원이 현재는 시·군·구이지만 당시는 면 단위입니다. 면의회 의장이 면장이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행정력이 남달랐던 조삼성 면장님은 섬마을 시골길을 개설할 때도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주민들과 소통하고 동고동락하며 뜻을 모을 수 있었다고 후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이 평생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셨다는 흔적은 영종공설묘지 공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영종면의회 의장, 초대 민선면장, 영종농협장, 대한노인옹진군지부장, 영종중·고학교 유치, 북도면 전기·전화 유치’... 묘비에는 당신이 걸어온 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생전의 고인을 아셨던 분들은 입을 모아 인품이 훌륭하고 주민과 잘 소통하면서 평생을 공익을 위해 헌신하신 지역의 표상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후배들이 선배의 인생을 아름답게 보고 뒤를 이어가기를 바랄 뿐입니다.조삼성 면장님은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춰야 된다는 지론을 항상 가르쳤다고 합니다. 57년 동안 공직자로서 소임을 다하시고 퇴직할 당시 800만원의 빚을 지고 계셨다고 하니 재물을 탐하지 않은 청렴한 정신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빚을 둘째 아들 조규종씨가 인삼농사를 해서 몇 년에 걸쳐 갚았다고 합니다. 현대의 청년들이 이 분의 정신을 본받는다면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고인은 영종농협장도 역임하셨습니다. 영종농협은 리·통에 있던 조합을 합병하여 면단위 농협을 설립한 것입니다. 조삼성님은 조합장을 맡으면서 자비를 들여 농기계를 구입해 선진농법을 보급하는 등 조합원인 농민들의 소득 향상에도 앞장섰습니다.지금의 인천 중구농협은 축복받은 농협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정부 때 특별법에 의해 단위농협이 설립되었지만 소득 창출은 없고 재무구조가 열악하다보니 보리 수확 때 보리로, 벼농사 수확 후에는 벼로 출자를 받아 겨우 연명하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 때의 현실을 현재 일하고 있는 농협 임직원들이 꼭 알았으면 합니다. 당시 농민조합원의 소득창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비를 쓰셨던 조합장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중구농협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조삼성 면장님은 지방자치 시절 뜻있는 분들과 함께 영종통운을 통해 영종호가 다닐 수 있게 하였습니다. 당시는 만석동에서 구읍뱃터로 하루에 4회 정도 운항하다가 훗날 월미도에서 구읍뱃터로 용주해운 도선이 운항하게 됩니다. 이런 뱃길이 지금의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등이 생기게 된 단초가 되었으며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설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입니다. 또 전기와 전화가 들어오지 않던 1980년 이전에는 초롱불을 밝히고 생활하였습니다. 당시 상공부장관에게 영종·용유·북도면 주민들의 뜻을 강하게 전달하여 한국전력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게다가 중등교육시설이 제대로 없던 시절에 지역의 지인들과 뜻을 모아 학교 설립을 유치하는데도 적극 앞장섰던 분입니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손자 조충현 사장의 기억에 조삼성 할아버지는 늘 근엄하신 분이셨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늘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외출하면 주민들이 할아버지께 다가와 인사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면 어린 나이였지만 주변 분들이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만들어지기까지 수 많은 선배들의 노고가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애쓰셨던 선구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는 없지만 그 업적을 길이길이 기억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이것이 후배로서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선구자들이 남겨주신 이 아름다운 유산을 우리 모두 뜻을 모아 후손들에게 더 나은 모습으로 물려주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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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9-21
  • 애국과 지역사랑의 모범을 보여준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
                    김홍복전 인천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장   길고 길었던 장마와 연이은 태풍이 지나가고 어느덧 절기상 ‘추분’이 되었습니다. 24절기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16번째 절기를 맞은 것입니다. 새삼 시간이 참 빠르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추분에 즈음하여 논밭의 곡식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것을 조선시대 선조에게 배웠듯이 무엇이든지 때가 있고 그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누구의 후손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온고지신(溫故知新)’입니다. 역사는 때가 지나면 알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을 방문해 김명준 종친회장님과 김명식 총무님으로부터 선친들이 걸어온 길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 문중은 조상 김일손의 후손인 김성원 선조께서 1464년 영종도에 입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김성원 선조는 문과·무과에 급제한 분이셨지만 당시 정세가 불안하던 시대여서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다시 충청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으로 들어오셔서 신불도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조분은 세 아들을 낳으셨는데 현재 신불도의 김홍석씨네가 작은집인 셈이고, 삼목도 김진영 공항교회 장로님네가 큰집, 넙디 김흥선씨네 집(중구 문화재 지정)이 김해 김씨 영종문중의 시초입니다.   이후 김해 김씨 영종문중은 지역의 뜻있는 일을 주도하고 동참하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일제시대 때는 독립자금을 대고 보통학교 설립을 주도하는 등 애국 활동을 많이 한 문중입니다. 먼저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써달라며 쌀 3,000석을 내놓았는데 당시는 정미해서 100Kg가 1석 가마니로 유통하던 시절로 현시세로 아주 큰 금액이었습니다. 넙디 김종현 어른의 집이 경제적으로 풍족했기에 선친께서 선뜻 독립자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기에 보통의 애국심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조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후손들도 이어받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일제시대 당시 영종도에 학교가 없어 교육환경이 매우 열악한 시절이었습니다. 이 또한 당시 면장을 역임하신 김달현 어른이 중심이 되어 1920년 9월 22일 전소에 영종공립보통학교를 건립하였습니다. 이 학교가 바로 현재의 영종초등학교와 영종중학교입니다. 영종초등학교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영종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를 건립한 문중의 후손으로서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더불어 영종도의 섬과 섬을 연결하는 돌다리 건설사업도 이 문중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맨 먼저 삼목도를 연결하고, 두 번째로 영종도와 신불도를 연결했고, 세 번째가 영종도에서 용유도를 연결한 것이라고 합니다. 주민들은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웠는데 현재는 문중 사당으로 이전해 놓았습니다.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 종친회는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문중 사당에 모여 시제를 지내고, 정월에는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 문중의 사당은 김홍석 이사의 작은아버지인 김승선씨께서 큰 돈을 후원해 건립하였습니다. 김승선씨는 16세에 일본으로 징용을 끌려가서 모진 고생을 하다가 일본에서 사업을 하셨습니다. 이후 영종 고향에 김지선, 김순선, 김형선, 김예선 형제를 찾아오게 되었고 형제들과 뜻을 모아 사당을 건립한 것입니다. 후손들은 김승선 어른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었습니다. 이 일에는 종친들도 십시일반 후원하며 뜻을 함께 해서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 종친회의 이사는 김동천, 김홍석, 김홍빈, 김홍명, 김동인 등 다수가 맡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열심히 뿌려놓은 씨앗으로 열매를 맺어가는 후손들을 살펴보면 인천대교 김수홍 전 사장과 과천시 총무과장 출신인 김홍흥씨, 현 경기도청 김동수 수산과장과 김귀남 남동경찰서 경감, 중구청 김홍남 농수산과장 등이 있습니다. 또 중구농협 초대 조합장, 옹진수협조합장, 중구 노인회장을 역임하신 故김홍범 조합장이 계시고, 인천시의원과 인천중구청장을 4번 연임하신 김홍섭씨도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 중구의회 의원과 중구농협 조합장, 중구청장까지 역임했던 필자도 문중 사람입니다.송도에서 신비라인 피부과 김홍병 원장, 중구청 김도경 인사팀장, 김동옥 보건과장,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김동환 과장도 모두 같은 문중입니다. 故김홍전 인천일보 전 논설실장님도 계셨습니다.   끝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뜻있는 제안을 드립니다. 김해 김씨 영종문중이 이 지역과 국가를 위해 여러 공헌을 하며 걸어온 길에 LH에서도 함께 뜻을 이어가고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역주민들을 위해 일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오래 전부터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이 지역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름답고 값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역주민들과 관공서, 기업들이 함께 힘을 모아 협력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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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9-15
  • 무의도 발전을 이끈 인천 중구의회 차석교 초대 의원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변동불거(變動不居: 변하고 움직여 가만히 있지 않는다)   1991년 김영삼 정부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지방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인천 중구의회는 3월27일 선거를 실시하고 4월15일에 개원했고, 인천시의회 선거는 6월에 치러졌습니다. 중구의회에서는 영종동에서 필자와 용유동에서 차석교 의원이 당선됐고, 우리 지역 시의회의원으로는 이세영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이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이 세 사람의 조합을 두고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삼형제’라며 주민들께서 축하해 주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무의대교를 건너 무의도 곳곳을 들러보면서 문득 인천 중구의회가 시작된 1991년 당시 차석교 초대의원님과 함께 했던 의정 활동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당시 지방의회 선거에서 용유동 주민 분포가 용유본동 2,200명과 무의동에 500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무의동에 거주했던 차석교 후보님이 당선되었습니다. 차 의원님은 무의 9통에서 11통까지의 도로 개설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그 당시 무의9통 큰무리에서 11통까지의 도로는 경운기조차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는데 당선되고 차석교 의원이 발의하고 제가 동의함으로써 도로 개설의 단초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자비를 써가며 토지주 189명을 찾아 일일이 소통하고 도로개설을 위해 동분서주 바쁘게 뛰어다니셨던 차석교 의원님의 열정과 노력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특히 차 의원님은 당시 중구의회 의원 13명 전원을 무의도 현장으로 대동해 경운기를 타고 현장을 다니며 도로개설의 당위성을 설명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열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이 근간이 되어 훗날 무의11통에서 소무의도(12통)로 인도교 교량도 놓이게 됩니다. 이때는 차석교 의원님이 수협조합장을 맡으실 때였고 저는 중구청장을 역임하면서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   차석교 의원님은 또 연안부두에서 무의도까지 오가던 ‘관광5호 여객선’이 손님이 줄어 운항을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광객 유치’에 팔을 걷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호룡곡산과 국사봉 등산로 개발을 위해 주민들과 함께 자비를 들여 임야 소유주를 설득하고 중앙 언론을 통한 무의도 관광여행 홍보를 하게 됩니다. 그런 활동이 하나 둘 모여 관광객들이 점점 늘기 시작하고, 주민들이 힘을 모아 ‘실미도 자연발생유원지’와  ‘하나개해수욕장’을 관광지화 하여 지금의 사회적 기업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또 지금은 고인이 되신 무의10통 강충부 전 통장님께서도 힘을 보태주셨기에 하나개해수욕장이 주민의 소득 증대와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실미도 재빼기길을 차석교 의원님이 당시 9,000만원이라는 거액의 자비를 들여 도로를 개설하면서 실미해변이 관광지가 되었고, 현재의 쏠레오 투자회사가 복합리조트 개발계획을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신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관광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덕교8통에서 잠진도길 바다에 폭 10m 도로를 개설하기까지 이세영 시의원과 차석교 구의원, 그리고 저 세 사람이 참 많이 연구도 하고 공무원들도 설득하며 오늘의 도로를 만들어냈고, 그 길이 무의해운 도선사가 운항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됩니다. 그 이후에 박상은 전 국회의원님의 뜻도 더해져서 지금의 무의대교가 탄생되었습니다.   이러한 업적 뒤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1976년 차석교 의원님의 부친이 복통이 생겼지만 저녁에는 육지로 나갈 수 없던 시절이라 다음날 동이 트고 작은 배를 타고 육지로 이송하는 도중에 소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차 의원은 섬 주민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설움과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무의도가 육지가 되어야 하고 육지와 통하는 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차 의원님과 저를 비롯한 기초의회 일꾼들은 그 당시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일례로 중구의회 건축조례를 개정하여 당시 옹진군에 있던 미등기 건축물을 양성화시켜 전부 신규 건축물로 등재할 수 있도록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역 사랑의 뜻이 모여서 무의도가 지금의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관광객 북적이는 현재 무의도의 모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섬 사랑의 씨앗을 뿌려왔던 차석교 의원님의 노력인 것입니다.  무의 잠진도길, 소무의도 연육교, 무의대교 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당시 ‘삼형제’ 이세영 시의원(전 중구청장), 차석교 구의원(전 수협조합장), 김홍복 구의원(전 중구청장/농협조합장)이 심어놓은 씨앗이 오래도록 값진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축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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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9-07
  • 가문의 얼을 이어가는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은 신석기시대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며 3·1운동을 함께 했던 조상의 얼이 살아 숨 쉬는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곳 용유동·을왕동에 위치한 늘목마을에 집성촌을 형성한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문중은 59대에 용유지역에 입향해 늘목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70대손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11대째 이 곳에서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곳에 입향한 59대 정세유 선조분께서는 세 아들을 두셨고 그 아들들의 후손이 지금의 정씨 용유문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에는 당시 큰아들의 후손인 정동선씨, 둘째 아들의 후손 정영철·정영목씨, 셋째 아들의 후손으로는 정의훈(고인)·정성모씨가 계십니다.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 정성모 종친회장님을 만나서 가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67대손인 정성모 회장님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59대 선조분의 셋째 아들 후손으로 이 종친회를 7년째 맡고 계십니다. 종친회를 함께 이끌고 계시는 부회장은 정영철 남북동어촌계장님, 총무는 정종문씨(남북동교회 성도), 고문은 정봉훈 전 농협이사와 정지성 중앙 종친회장님입니다. 참고로 경주 정씨 중앙 종친회는 영등포 대방동에 있으나 앞으로 파주로 이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선조들의 자취를 돌아보면 용유면장을 역임하신 정명환(고인)님이 계셨으며 정성모 현 회장님은 인천광역시에서 부이사관으로 정년퇴임하셨고 정지호 사무관(용유중앙교회 장로)도 계십니다.용유 남북동 옛 용유중학교 옆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있습니다. 당시 13세였던 정영옥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정영옥씨가 여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남성이라고 합니다.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의 종중 선산은 늘목에 산 200평 정도가 있습니다. 매년마다 음력 10월 둘째주 토요일에 친척 30명 정도가 모여 시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경주 정씨 용유문중의 종친회는 1년에 한번 정기회를 하는데 시제날 같이 하고 임시회의는 연말에 하곤 합니다. 또한 종중간 애·경사에는 종친회 명의로 조화나 화환을 보내줍니다. 종중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노력하시는 정성모 회장님의 노고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정 회장님은 자칫 잊혀질 수 있는 가문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전자족보를 도입해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일입니까. 정성모 회장님에 의하면 영종도에도 정씨 문중이 있었지만 578만평 규모의 영종 도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모두 뿔뿔이 흩어져 현재는 그 근황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다만 정기남(고인)씨가 영종문중 종친회장을 역임했던 것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정성모 회장님은 “선조들의 사상과 뜻을 잊지 말고 후대에서 또 후대에게 뿌리 사상을 이어가도록 해야만 하는데 지금의 젊은 후손들이 이 같은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고 말씀하십니다.‘전분세락(轉糞世樂)’이란 말의 뜻처럼 ‘만일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면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지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하라. 만일 두 다리가 부러졌다면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 만일 목이 부러졌다면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를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최악이 아님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살아서 숨 쉴 수 있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걸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젊은 세대들이 왜 이 모양이지 하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나부터, 우리 종중부터 이념과 조상의 얼을 찾아 하나씩 그 뜻을 받들어 가면 그것이 가문의 얼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차근차근 주어진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모여서 큰 성과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비바람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혜의 왕인 솔로몬처럼 정성모 회장님과 경주 정씨 용유문중의 특별한 지혜가 모아져서 서로 격려하고 지역을 사랑하는 종중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종중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중지를 모아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이 뜻깊은 종친회로 계속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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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8-25
  • 삶의 향기가 아름다운 안동 장씨 영종파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긴마루라는 뜻을 가진 ‘영종(永宗)’은 문헌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 자연도로 칭했고 당시 영종도에는 ‘경원정’과 함께 ‘제물사’라는 절도 있었습니다. 제물사는 송나라 사신들이 꼭 방문하는 필수 관광지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곳 영종도 운서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온 안동 장씨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운서리 모랫말 마을을 중심으로 안동·인동 장씨의 후손들이 김포파에서 이곳으로 입향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무의도9통 큰무리 마을에 계시는 장원섭(77세) 종친회장님과 안동 장씨 영종파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의9통 노인회장이신 장원섭 회장님은 12년 전부터 영종파 안동 장씨의 종친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큰아들 장정민(52)씨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며 둘째 아들은 남동구 서창동에 거주하는 장정재(49)씨입니다. 원래 안동 장씨 영종파는 운서4리 모랫말에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회장님의 고조부께서 용유와 을왕리 농토와 무의9통 방죽논 농토 관리를 맡게 되면서 큰무리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집안에는 묘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선조 한분이 지관(묘자리 봐주는 사람)이셨는데 지금의 무의10통과 11통 사이의 임야에 있는 산소를 보고 한곳은 부자가 될 수 있으나 집안이 병치레를 많이 할 터이고, 다른 한자리는 아들만 출산하면서 집안이 평안할 것 같다는 것인데 선조들이 두 번째 자리를 산소로 썼더니 정말 자손들이 아들만 출생했다고 합니다. 고전에서나 읽을 법한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미풍양속에서 나오는 생활풍토로 믿어집니다. 그때의 장원섭 회장님의 집안은 지관의 얘기대로 아들만이 번창하는 집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동 장씨의 영종파 내력은 34대째이지만 영종의 내력은 21대에 영종으로 유입되었다고 기록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3대 정도가 영종파의 종중들이 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터전을 일구어 갔다고 보여집니다. 안동 서호면에 안동 장씨 시제를 지금도 그 곳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니 아마도 본 안동 장씨의 뿌리는 그 곳에서 출발했다고 봅니다. 영종파 안동 장씨의 종친회 모임조직 형태는 회장, 고문, 부회장, 총무, 이사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종중 모임입니다. 장명수(80) 부회장님은 운서동 공항신도시에 거주하시고, 장태동(68) 총무님은 모랫말 출신이면서 시내 거주하고, 장성수(68)·장경동 이사님 등 종중의 뜻있는 분들이 함께 종친회와 연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문은 모랫말 출신 장갑동씨가 맡고 있습니다. 영종이 섬으로 있을 당시 영종통운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2008년 영종도에서 578만평 토지보상 문제로 안동 장씨의 선산과 납골묘, 산소 등이 수용이 되면서 받은 보상금으로 지금의 하늘도시 운서지구에 3층 건물을 지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종친회를 운영하신다고 합니다. 월세를 모아 1억원 정도를 장학금으로 만들어 종중 자손들에게 장학사업도 계획하고 있고, 종친회 건물은 앞으로 쉼터를 만들어 시내에 거주하는 종친들이 고향을 찾았을 때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한다고 하시니 이것 또한 애향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영종에 입향한 21대 장서운 선친은 임진왜란 당시에 이곳에 입향하셔서 신입장군 종사관이라는 관직도 역임하셨는데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서 전사하여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22대는 명예직이지만 가선대부의 직함을 종중의 어른 역할을 했던 기록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33대 장익환씨는 교장선생님으로 지역에서 교육봉사 활동을 많이 하셨다고 전해집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은 생의 끝자락에 있다고 했나요. “우리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다음 세대가 이 가풍을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영종파 안동 장씨라는 자손임을 자랑해야 할텐데...” 하는 회장님의 말씀 속에 뿌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영종·용유 애향가족들이 가치관을 가지고 종중의 반듯한 사랑을 자손들이 이어갈 그날은 우리 모두가 행복한 나날들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왕 솔로몬에게 무엇을 가장 원하는냐고 묻자 그는 지혜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선조들의 지혜를 우리가 보고 배웠듯이 사회생활에 접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얼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인생의 승패는 얼굴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항상 웃으면서 편안한 얼굴 이것이 우리 선친들이 지킨 가풍이라는 종친들의 말처럼 항시 행복한 사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그런 소중한 영종파 안동 장씨의 가풍을 이어가는 자손들이 되기를 축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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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8-18
  • 인천 중구 고용위기지역 지정을 위한 골든타임은 지금!!
    인천 중구 고용위기지역 지정을 위한 골든타임은 지금!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유행에 따라 인적·물적 이동이 제한되면서 항공 및 해운 산업과 이와 연계한 서비스업이 밀집해 있는 인천 중구 지역이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해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관계기관의 적극적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천연구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인천국제공항은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개항 이래 여객 및 운항에서 최저 실적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며, 인천항을 중심으로 한 해운 물류산업도 마찬가지로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    본 의원은 이러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인천 중구를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하여 근로자 고용유지 및 기업 세제 혜택 등 다양한 국가지원을 이끌어내고자 지난 제263회 인천광역시의회 정례회에서 ‘고용위기지역 지정 촉구 건의안’을 발의하여 청와대, 국회 등에 전달하였으며, 인천공항경제권협의회와 함께 ‘고용위기지역 지정 촉구 서명부’를 관계부처에 전달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인천 중구를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각계의 다양한 노력과 더불어 인천시를 비롯한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논리개발과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전략적 방안 마련이 병행되어야 한다.    현재 고용위기지역 지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은 고용위기지역 신청 직전 1년간 고용보험 피보험자 증감률 등 정량적인 지표이며 이러한 지표를 중구에 적용할 경우 현시점에서는 고용위기지역 지정의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현 정부의 고용유지 지원 정책으로 무급휴직 상태인 근로자들이 실업자가 아닌 고용보험에 가입된 상태가 유지되고 있으며, 실제 중구 관내 사업장에 근무하고 있는 항공, 항만 관련 근로자들의 고용보험은 본사가 위치한 서울에서 통계가 집계되는 등 지역적, 시기적 불합리성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인천 중구청이 중부지방고용노동청 및 인천시 노사민정협의회의 심의를 거쳐 지난 4월 23일 고용노동부에 신청한 고용위기지역 신청은 법률상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여 지정이 보류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본 의원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09년 8월 쌍용자동차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인해 평택시에 대량 실직인원 증가시 고용노동부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고용정책심의회 결정에 따라 평택시를 고용위기 지역으로 지정하여 여러 가지 혜택을 근로자와 기업에게 지원한 사례가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고용위기지역 지정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대응과 현실에 맞는 논리 개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중구청과 인천광역시 역시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을 중심으로 불어 닥친 인천 중구지역의 살인적인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고용보험 가입 증감률 등과 같은 정량적 지표의 불합리성을 강력하게 관계부서에 피력하고 인천 중구의 산업구조 및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개발하여, 인천 중구를 고용위기지역으로 하루 속히 지정하여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 줄 수 있도록 적극적인 대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본 의원도 이러한 노력에 모든 역량과 열정을 같이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필요하다면 인천광역시의회의 모든 역량을 끌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하여 관계자 격려 및 대응방안 마련을 위해 인천광역시 재난안전상황실을 방문할 당시 ‘인천시가 과잉대응하면 시민은 더 안전합니다’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본 적이 있다.  인천 중구 고용위기지역 지정을 위한 과잉대응 역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과잉대응의 핵심은 때를 놓치지 않는 타이밍이다.  인천광역시, 중구청은 인천연구원, 일자리 및 경제관련 유관기관과의 유기적 협력을 통한 대응논리 개발 및 대처에 최선을 다해 고용위기지역 지정과 관련한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인천광역시의회 조광휘 시의원
    • 칼럼
    • 외부기고칼럼
    2020-07-22
  • 개발도상국에 영농기법 전수하는 실미원 영농법인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인천 중구 무의동 433번지 실미해수욕장 입구에 실미원 영농법인을 찾아 신순규 대표와 담소를 나누면서 진실한 농심(農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농사짓는 것이 어려운 일로 모두가 기피하고 있지만 식량이 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식량안보를 위해서라도 우리 농업의 맥을 이어가야 할 중요한 사업입니다.   현대의 영농은 다른 산업분야와 마찬가지로 선조들의 지혜에 기술이 더해져 과학영농으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선진 영농기술로 우리 농업을 발전시키는 영농후계자가 바로 실미원 신순규 대표입니다. 옥수수는 토양성분 정화용으로 심는다는 과학영농과 고추농사도 남들이 1개를 수확할 때 이 분은 3개를 수확할 수 있다는 농업기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친환경 농법 중 고추를 심고 사이사이에 옥수수를 심어 해충을 옥수수에 모여들게 한다는 지혜를 들으며 몰랐던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별이 있기 때문이란 말처럼 이런 농민이 있기에 우리 농촌이 살아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값진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곳 실미원 농장은 신순규 대표와 부인 장명숙씨, 아들 내외가 함께 지내며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들 신지용씨와 며느리 최은숙씨 부부는 농수산대학 학내 커플로 전공을 살려 영농법인을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부는 요즘 보기 드물게 다자녀를 둔 가정으로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공항중학교 1학년인 신기훈, 용유초 무의분교 4학년인 영주, 3학년인 영은, 다섯 살인 영선, 세 살인 기영 5남매와 함께 3대가 모여 사는 모습에서 한없는 행복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공익적 차원의 목표가 뚜렷해야 농업을 할 수 있다’는 신순규 대표는 1988년 농업 경영인이 되었고, 2005년에는 ‘농업 신지식인’으로 선정돼 포도를 주로하고 다른 작물도 재배하는 복합영농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네팔, 에디오피아, 키에르키스탄 등 개발도상국에서 우리나라에 농업 교육을 받으러 온 외국인들에게 5년째 영농교육을 하고 계십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예년처럼 교육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벌써 세 차례에 걸쳐 150명의 교육생을 배출했다고 합니다. 이 영농교육은 서울시가 교육비를 전액 지원해 개발도상국 농민들에게 친환경 농법을 전수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한번 교육할 때 정원이 20명 정도인데 40~50명까지도 지원자가 몰린다고 합니다.    신 대표는 농수산대학에서 현장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농업의 선구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매뉴얼 교육만이 아닌 실물 중시의 자연농법을 가르친다고 이야기 합니다.  개발도상국 산업체 요원이 휴일이면 이곳을 찾아 농촌 일손 돕기도 하고 친환경 농업기술도 배우겠다고 찾는다고 하니 한국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앞선 농법을 개발도상국 농민들에게 전수하는 실미원 신순규 대표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며 참 좋은 농심(農心)을 전하는 행동에 존경을 표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듭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농심을 가지고 계신 농업인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도 더해집니다. 식량 무기화 시대에 돌입한 현재 인천시의 농업 행정이 과연 선진농업을 지향하고 있는지 농업인으로서 묻고 싶어집니다. 실미원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농업교육을 서울시가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인천시와 인천 중구의 농업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일월영측(日月盈?)’ 즉 해와 달은 차면 기운다고 합니다. 농업과 농촌이 살아야 지역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행정관청의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이 그 위치에 있으면서 주민들의 편에서 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진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 칼럼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7-01
  • 물취이모(勿取以貌)
                    김 홍 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장 나이와 세대를 초월해 만날 수 있고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특히 꿈과 희망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입니다. 최근 영종청년연합회 김병철 회장을 만나 차 한잔을 마시며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영종청년연합회는 50여명의 회원이 있으며 김병철 회장을 중심으로 운영이사 홍상기, 정봉규씨가 상하간 계층조율을 하고, 김진호 운영이사가 총괄 역할을 하며 연합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연합회는 중산동에 사무실을 두고 지역에서 여러가지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그 재원을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한다고 하니 그 정성과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지역의 어른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새해 첫 날 백운산 정상에서 따뜻한 음료와 차를 대접하기 위해 회원들이 손수 그 무거운 물을 이고 지고 정상에 올라와서 천명이 넘는 해맞이 주민에게 대접하는 이 청년들을 우리는 무심코 지나치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에게 대접한 한잔의 물은 255m 정상까지 지고 올라와서 정을 나누는 청년회원들의 땀이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외에도 사랑의 밥차 봉사활동과 지역의 환경 정화에도 늘 솔선수범하는 영종청년연합회 모든 회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회원들의 헌신은 멀지 않아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지리라 확신합니다. 김병철 회장의 ‘행복이 따로 있나요. 작은 일에도 서로 웃고 즐기고 함께 쌓아가는 것에서 오는 성취감이 바로 행복이겠지요’라며 미소짓는 얼굴에서 우리 지역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보았습니다.   김 회장은 영종 신불도 김상권씨의 첫째 아들로 만수중, 부평고, 연세대에서 축구를 하고 삼익악기실업팀에서 선수로 뛴 열정의 청년입니다. 옛 반길안 김용환씨의 둘째 딸과 결혼해 지금은 공항신도시 단독주택에서 아들 쌍둥이를 키우며 애향 가족의 대를 잇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인천 유나이드 아카데미 영종지부장 감독을 하면서 유소년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꿈나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4명의 코치와 함께 150명의 꿈나무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방과 후 축구 선수반은 2시간 수업을 하고 취미반은 1시간 30분 지도를 한다고 합니다.   10년 정도 유소년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안산그리너스 선수인 고교 2학년 제자를 선두로 해서 서울 동북중학교, 숭실중학교, 인천 부평동중학교 축구부 등 유수의 축구팀에 스카웃되고 주전선수로 활약중이라고 합니다.   ‘운동을 가르치는 선생도 추구하는 철학이 있어야 되고 운동뿐만 아니라 바른 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운동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지는 학생들을 볼 때 비록 생활은 궁핍하지만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젊은 지도자의 건강한 생각을 배우게 됩니다.   김병철 회장은 나를 위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안전거리’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반화된 용어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오래 전부터 ‘안전거리’를 이야기 해 왔다고 하더군요.    김 회장이 늘 주위와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삶의 철학과 원칙을 세우고 살아가듯 삶의 목표가 반듯한 영종청년연합회 회원들의 앞길에 행복이 함께 하리라 믿습니다.   대인관계의 원칙 중에 나와 같이 있는 것을 상대방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온화한 사람이 되라는 글귀처럼 참 철학이 투철하고 뜻이 같은 회장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물취이모(勿取以貌)’라는 고사성어가 김병철 회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늘 츄리닝과 점퍼차림을 하고 있어 스포츠인으로만 보이지만 그와 담소를 나누면서 내가 오히려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고 진지한 얼굴에 운동선수답지 않게 어찌 그리 성품이 좋은지 참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축구를 배우려는 유소년들에게는 ‘꿈’을 갖게 하고, 지역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봉사와 실천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김 회장에게서 영종의 미래가 더욱 든든해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은 말없이 실천하라는 ‘무언실천(無言實踐)’의 경구처럼 김병철 회장과 영종청년연합회 회원들이 한 마음이 되어 지금보다 더 크게 뿌리 내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향기로운 단체로 지역사회에 우뚝 서기를 기대합니다.
    • 칼럼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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