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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12.08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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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 강대상에도 두 번째 촛불이 불을 밝혔습니다. 지난주에는 교회 외벽을 이용한 성탄 조명 장식을 하고 점등식을 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암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웃들을 향한 희망의 빛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 빛을 보는 사람마다 우울한 감정이 사라지고 살고 싶은 생의 소망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 빛이 주는 메시지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잠시 생각해 봅니다.


아기 예수를 잉태하여 만삭이 된 마리아와 그와 정혼한 요셉은 호적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팍팍한 삶이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의 인심도 팍팍해집니다. 오랜 식민지 생활로 삶이 고단해서인지 만삭이 된 이들 일행을 위하여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저들을 맞아들이겠지’ ‘우리는 형편이 안 돼’ ‘낯선 사람을 맞아들였다가 불쾌한 일에 연루될 수도 있어.’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천여년 전 베들레헴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짐승이 머무는 헛간에서 예수님은 탄생하셨고, 아기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짐승의 구유에 누여졌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성탄절의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극장에 화가들이 개봉 영화 주요 장면을 큰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놓고 홍보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다니던 교회도 화가가 있어서 12월이면 예수님 탄생과 관련된 성화를 강대상 배경으로 크게 그려놓았습니다. 그림의 단골 내용이 구유에 누인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마당이나 로비에 마구간 소품을 전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 그림이나 소품을 지나며 성탄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에,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한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그 예수님이 찾아오실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풍요로워 보이지만 우리 사회의 이면에는 아직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작업장에서 끼어 죽고, 깔려 죽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차가운 바닷물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며, 학대를 받아 죽음을 맞이한 아기, 죽음조차 방치되어 수개월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는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텅빈 가슴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깜깜한 베들레헴의 밤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목마른 자에게, 옥에 갇힌 자에게, 배고픈 자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곧 예수님 자신에게 베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시인은 “문이란 문은 모두 두드려,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안부를 묻고 싶다. 그리고,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고 모두에게 갓 구운 빵 조각을 주고 싶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통로로 하여 사람들에게 찾아오십니다.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우린 남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그런 마음에는 예수님이 오실 수도 거하실 수도 없습니다. 대림절 성탄의 불을 밝히며, 예수님이 오셔서 거하시고 일하실 수 있는 거처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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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대림절, 성탄의 불을 밝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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