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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개는 입으로 말을 못 합니다. 그래서인지 개는 사람에게 눈으로 말합니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새까맣고 큰 눈으로 주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반가움을 표합니다. 식사 때면 발치에 앉아 눈으로 ‘뭐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물론 식탁 밑 그 눈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집에서 나 혼자인 것 같기는 하지만요. 동물과도 눈으로 무언의 대화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데, 사람 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눈으로 말해요.?살짝이 말해요.?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눈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단둘이서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눈빛으로 전 세계를 울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사나 사진에 수여하는 퓰리처상이 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인물의 눈망울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큰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지선 교수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간증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대학생 시절 교통사고로 몸의 55%를 3도 화상을 입고, 40번의 대수술을 거치고서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한 화상으로 얼굴은 다 녹아내리고, 양손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은 다 절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굳이 다시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녀의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게 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눈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고 후 병원으로 옮겨져 화상 수술을 받고, 얼굴을 돌돌 감고 있던 붕대를 처음 풀던 날의 경험을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얼굴을 본 엄마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어요.”?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여전했다는 것. 한 존재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얼마나 그 존재에게 안정감을 주고 자존감을 부여하는지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은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집에 누워 있는데, 부인이 빨래를 개라고 시켰답니다. 자신은 암 환자니까 이제 그런 일을 안 시킬 줄 알았답니다.?‘나 환자잖아~’?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산더미 같은 빨래를 자기 앞에 밀어주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뛰어가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아이는 호들갑 떠는 부모를 보는 순간 울음보가 터집니다. 그러나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면, 자기도 대수롭지 않은 듯 스스로 털고 일어난다고 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약하고 서툰 못난 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안정감은 나를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입니다. 그 눈빛을 느껴본 사람은 편해집니다. 그 안정감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잔잔히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빛입니다. 여러분, 느끼십니까! 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찬양을 불러보세요.?“하나님,?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그 사랑의 눈빛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면, 자녀는 안정감을 가지고 꿈을 향하여 도전할 것입니다. 그 눈빛으로 교인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안정감을 가지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눈빛만 보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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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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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신앙과 삶의 깊이
    #1. 교양 : 신앙의 깊이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유명한 금식기도원에 다녀올 때 기도원 버스에서 희한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한 주간 금식기도를 마치신 분들이 버스 자리 때문에 다투는 것입니다. 말이 점점 험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참 민망했습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달라하는 자에게 속옷까지도 주라” 하셨는데, 어쩌자고 자리하나 양보를 못하고 다른 사람들 눈살을 찌푸리게 할까요. 양보는 차치하고 교양이라도 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신앙에 걸맞은 교양을 가져야 합니다. 예의 없는 언행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지적받지 않으면 자신의 언행이 얼마나 교양이 없는지 잘 모릅니다. 생각해 봅시다. 자신의 말과 태도가 상대를 얼마나 불쾌하게 할지, 힘들게 할지, 공동체의 분위기나 격을 얼마나 떨어뜨릴지 생각해야 합니다. 안에서 깨진 사발이 밖에서도 소리를 내지 않겠습니까? 교양을 갖추지 못한 신앙인은 교회 밖에 나가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교양 없는 교회와 신앙인이 전하는 복음은 그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교회 밖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지 않습니다. 교양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거친 삶을 살아오신 분들은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2. 깊이 :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교인들의 피상적인 믿음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신앙이 깊이가 없습니다. 그가 하는 예수님 이야기는 별 감동이 없습니다. 찬양도 기도도 말도 피상적입니다. 깊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신앙이 냄비처럼 빨리 뜨거웠다가 금방 식어버립니다. 좀 열심히 하면 주변 사람들이 ‘응~ 저러다 금방 식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신앙이 가볍게 보입니다. 그의 처신이 가볍고 삶도 깊이가 없습니다. 그런 신앙으로는 역경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신앙과 삶의 깊이는 어디서 나올까요? 회개의 깊이가 신앙의 깊이입니다. 연약한 자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존재와 분리할 수 없는 무서운 죄악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오는 깊은 회개가 있는 신앙은 다릅니다. 다윗은 어느 날 말씀으로 자신의 죄를 지적 받았을 때에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깊은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뼈 속까지, 어머니의 태속에서부터 죄악 된 본성을 가진 자아 인식은 그를 깊은 회개로 이끌었습니다. 깊은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아~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찬송 가사에도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그가 부르는 찬양, 기도, 말 한마디에 신앙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시련은 연약한 자아에 대한 깊은 인식과 깊은 회개로 이끄는 통로입니다. 이 과정을 거친 사람은 작은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압니다. 신앙과 삶의 깊이는 여기에서 나오게 됩니다. 시련이 우리에게 복이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여러분의 신앙과 삶 속에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깊이가 느껴질 수 있길 축복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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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8
  • [목회 단상] 무례한 기독교가 되면 안 됩니다.
        [목회 단상]   무례한 기독교가 되면 안 됩니다. 기독교는 한 분 하나님, 유일한 구원자를 믿고 섬깁니다. 기독교 진리의 본질상 독선적으로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종교 다원주의, 상대주의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진리 체계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하여는 타협이 없어야 하지만, 그 진리를 세상에 드러낼 때 무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과격하고 무례한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성경에 “사랑은 무례하게 행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 개신교회는 독단적이고 위선적이라는 악평을 듣고 있습니다. 이 이유 중 하나가 무례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동안 타문화와 종교, 그리고 다른 가치관들을 너무 쉽게 폄훼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사에서 십자군 전쟁의 폐단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힘으로 강요했던 실패한 역사이죠. ‘복음’을 받을래, ‘칼’을 받을래? 라는 방식은 주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 안에 이런 정서가 남아 있습니다. 이 정서가 세상에 표출될 때에 세상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합니다. 무례한 교회가 전하는 소식은 세상이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실현으로 세상에 오신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저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초대교회도 엄청난 박해를 받으면서 반정부운동을 펼치거나 저주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때리면 맞고, 용서하며 끝까지 진리를 드러냈습니다. 이런 사랑의 태도에 핍박하던 사람들이 감화를 받고, 거부하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본질에서 흘러나오는 교회의 이미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이것이 아닐까요? 풀러 신학교 총장을 지내신 리처드 마우 교수의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을 보면, 진리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기독교적 교양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것은 온유와 겸손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만큼 기독교적 교양이 필요합니다. 목적이 좋으면 수단도 좋아야 합니다. 교회는 더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향한 기독교적 환대가 필요합니다. 성경 시대 유대인들처럼 진리를 소유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세상과 더 많이 소통해야 합니다. 심판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마지막에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니,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정당하고, 세상은 모두 악하다 하지는 않았는지, 세상이 교회에 무엇을 원하는지 귀를 막고 담을 쌓고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교회는 세상을 복음 안에서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장래의 형제자매로 대해야 합니다. 무례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적 교양을 갖추어야 합니다. 신앙이 좋으면 예의도 발라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장윤석(하늘사랑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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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목회 단상]
        [목회 단상]   - 코로나19로 사회적거리두기가 4단계로 격상되어 교회·성당·사찰에서 대면예배가 금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소규모 예배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믿음을 가지신 분들이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없는 환경에 있습니다. 인천공항뉴스에서는 믿음으로 마음의 안식을 찾는 분들을 위해 지면 설교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목회단상을 써 주시는 장윤석 목사님은 하늘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매주 지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고 독자여러분들에게 나누어 드릴 것입니다. 인천공항뉴스에서는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지면을 열어둡니다. 지면을 통해 마음의 안식을 주고 선한 영향력을 전하고 싶으신 분들께서는 언제든지 저희에게 좋은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열정! 열정! 열정! 젖은 성냥으로는 불을 붙일 수 없습니다. 열정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루를 열정적으로 시작하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을 만나는 사람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좋은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삶의 의욕도, 아무런 열정도 없는 자에겐 좋은 일이 나타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걷어차 버립니다.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은 모두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영적인 일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과 열정이 있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십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이 위대한 인생을 삽니다. 나에게 열정이 없다면 하나님에게 다가가면 열정이 생깁니다. 영어로 열정(Enthusiasm)은 헬라어로 열정이라는 단어(Ancient Greek : ?νθουσιασμ?? enthousiasmos)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은 en(안에), Deos(하나님), 즉 ‘하나님 안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열정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온 세상을 만드신 열정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면 열정이 생깁니다. 모세는 80세 노인이었지만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애굽의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고자 하는 열정이 생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모든 비전과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다시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남은 생애를 불태워도 아깝지 않을 비전과 열정을 회복했습니다. 거리 두기 4단계 격상으로 교회는 다시 비대면 예배로 전환했습니다. 작년부터 반복적으로 대면-비대면-대면-비대면 형태가 반복됐습니다. 그동안 제한적이지만 20% 대면 예배라도 드리면서 조금씩 예배와 사역이 회복되나 싶었는데, 다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이 빠져버립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방역지침은 신앙과 예배의 힘 빼기에 딱 좋은 환경입니다. 믿음 좋았던 사람도 약해져 가고, 약한 사람은 아예 믿음에서 떠나가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는 비전과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다가가서 그분 안에 있는 열정을 가진다면 오늘을 멋지게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오버를 해야 할 때입니다. 배나 더 열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목사이니까 19명씩 열 번이라도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예배에, 가사에, 학업에, 일터에, 사명에 열정을 잃지 않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진 하루를 살라고 시간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열정의 하나님과 함께 삶의 열정을 가지고 하루라는 선물의 끈을 풀어보십시오. 곧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교회 담임목사)
    • 칼럼
    • 목회단상
    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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