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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산을 넘어서
어떤 여인이 8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중 3명은 청각장애, 2명은 시각장애, 1명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홉 번째 아기를 임신 중이지만 성병에 걸려있습니다. 다수의 사람은 ‘낙태해야 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음악 천재 ‘베토벤’입니다.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투표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3명의 후보가 있습니다. 후보 A :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적이 있고, 두 명의 부인이 있으며,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8~10병의 마티니를 마신다. 후보 B : 두 번 회사에서 잘린 적이 있고,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 시절 마약을 복용한 적 이 있고 위스키를 즐겨 마신다. 후보 C : 전쟁 영웅이다. 채식가였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 맥주를 가끔 마신다. 불륜관계도 가져본 적이 없다. 당신은 어떤 후보를 택하셨습니까? 후보 A는 루즈벨트, 후보 B는 윈스턴 처칠, 후보 C는 아돌프 히틀러라고 합니다. 선입견(편견)은 인간이 가진 못된 생각입니다. 편견으로 사람을 대하다가 실수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면 가난한 집 아이가 먼저 의심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은 사람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볼 것을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정오에 기도하던 중, 보자기에 가득 담긴 부정한 것들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먹으라 했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부정한 것은 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내가 깨끗하게 했으니 먹으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그들에게로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Ice breaking - 얼어붙은 생각, 즉 편견을 깨뜨리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편견을 깨뜨리고 고넬료의 집으로 갔을 때,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수백 년 동안 편견으로 인한 멸시와 차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찾아가셨고,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10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후에 그에게 감사한 유일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찾으신 사건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야 합니다(행1:8). 사마리아는 유대 땅과 가장 가깝지만, 편견 때문에 땅끝보다 멀고 어려운 곳입니다. 가깝지만 오히려 더 멀고 불편한 사마리아 같은 관계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품고 넘어서면 땅끝까지라도 갈 수 있습니다. 더 깊고 풍성한 관계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런 관계를 품고 넘을 수 있다고 격려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처럼, 오히려 사마리아인이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편견을 깨신 분입니다. 결국 내 안에 수많은 편견도 예수로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 바람, 성령 바람으로 편견과 오해를 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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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만남과 이별을 대하며
만남과 이별을 대하며 새 가족 등록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만남이 많다는 것은 목사로서 행복입니다. 가수 노사연 씨의 ‘만남’이란 노래 속에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솔직히 가사가 여기까지 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남 속에 우연은 없습니다. 만남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우린 부모님과의 최초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죽고 난 후에 눈을 뜰 때, 영원한 존재들과 새로운 차원의 만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만남은 설렘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만남 뒤에는 이별이라는 그림자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우릴 아프게 합니다. 부모도,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사랑하는 연인과의 만남도 예외는 아닙니다. 살면서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사람이나 환경을 처음 대할 때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지나친 애착으로 이별을 감당치 못해서도 안 됩니다. 만남과 이별에 너무 무관심해도 안 되고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기에 우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전제는 만남과 이별 속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도 만남의 축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만남이 축복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하고 노력이 뒤따라야 하고 투자해야 합니다. 무관심과 이기심은 불행한 이별을 낳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별도 있지만 대부분의 이별은 노력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멀리서 사는 친척이나 친구와 전화 한 통 없이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결국 멀어지고 만남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별 속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에 반드시 손해만은 아닙니다. 이별은 아쉽지만,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준비이며 서로를 위한 하나님의 선이기에 축복하며 보낼 수가 있습니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만남이 축복되고, 이별이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보다 야망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행복했지만, 이별은 언제나 아팠습니다. 만남과 이별이 반복될수록 그런 감정이 무뎌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만남은 행복하고, 이별은 아쉽고 아픈 것은 아직 미숙해서일까요? 그래서 나름 터득한 방법이 있다면, 헤어질 때 인사를 잘하는 것입니다. “어딜 가든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그리고. “다시 만나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큰 복은 없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두 번의 교회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라 아팠고, 또 다른 사정으로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헤어지는 인사를 잘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곳에서 다시 만납시다” 참석한 교우들과 함께 찬송도 불렀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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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 개는 입으로 말을 못 합니다. 그래서인지 개는 사람에게 눈으로 말합니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새까맣고 큰 눈으로 주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반가움을 표합니다. 식사 때면 발치에 앉아 눈으로 ‘뭐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물론 식탁 밑 그 눈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집에서 나 혼자인 것 같기는 하지만요. 동물과도 눈으로 무언의 대화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데, 사람 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눈으로 말해요.?살짝이 말해요.?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눈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단둘이서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눈빛으로 전 세계를 울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사나 사진에 수여하는 퓰리처상이 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인물의 눈망울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큰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지선 교수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간증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대학생 시절 교통사고로 몸의 55%를 3도 화상을 입고, 40번의 대수술을 거치고서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한 화상으로 얼굴은 다 녹아내리고, 양손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은 다 절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굳이 다시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녀의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게 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눈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고 후 병원으로 옮겨져 화상 수술을 받고, 얼굴을 돌돌 감고 있던 붕대를 처음 풀던 날의 경험을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얼굴을 본 엄마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어요.”?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여전했다는 것. 한 존재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얼마나 그 존재에게 안정감을 주고 자존감을 부여하는지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은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집에 누워 있는데, 부인이 빨래를 개라고 시켰답니다. 자신은 암 환자니까 이제 그런 일을 안 시킬 줄 알았답니다.?‘나 환자잖아~’?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산더미 같은 빨래를 자기 앞에 밀어주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뛰어가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아이는 호들갑 떠는 부모를 보는 순간 울음보가 터집니다. 그러나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면, 자기도 대수롭지 않은 듯 스스로 털고 일어난다고 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약하고 서툰 못난 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안정감은 나를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입니다. 그 눈빛을 느껴본 사람은 편해집니다. 그 안정감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잔잔히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빛입니다. 여러분, 느끼십니까! 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찬양을 불러보세요.?“하나님,?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그 사랑의 눈빛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면, 자녀는 안정감을 가지고 꿈을 향하여 도전할 것입니다. 그 눈빛으로 교인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안정감을 가지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눈빛만 보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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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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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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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진정한 삶에 헌신하라
- 장윤석목사<하늘사랑의 교회> 일반 자동차의 엔진이 분당 4천 회전을 한다면, 고급 경주용 차는 분당 1만 회전을 합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아침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엔진을 '분당 1만 회전'으로 올리고, 밤에 침대에 쓰러질 때까지 그 속도를 유지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하나님과의 소중하고 조용한 시간을 거의 허용하지 않습니다. 분주함은 영적 성장의 적이며,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세상적인 것으로 지칭되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으로 구체화 됩니다. 성도는 남들과는 다른 북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 같습니다. 그 북소리를 들으려면 시간을 헌신해야 합니다. 쓰다 남은 시간 말고, 미리 떼어 놓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멈추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일기를 기록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됩니다. 여기서 일기는 영적인 기록으로서, 오늘의 경험, 그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돌이켜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IVP)는 일기 쓰기가 영적 발전에 큰 진전을 가져다준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점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로 인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일기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결정을 반성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습니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우리 삶의 속도를 늦추어 줍니다. 이런 방식으로 멈추고 느려짐 속에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과 그분의 음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시간 동안 우리 영혼은 안식을 누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진정한 기독교의 향기는 이렇게 서두르지 않고 고요히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는 순간에서 비롯됩니다.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활동이 교회와 관련된 것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상시에 익숙했던 구절이,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딱 맞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 구절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로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구절이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시점에 성령님이 그 구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음식을 살 돈이 없을 때 이웃이 음식을 갖고 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공급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슬픔을 이해하고 우리를 위로하려고 애쓰며 안아 주는 친구의 품속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보살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것들은 삶의 속도를 줄일 때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진정한 삶에 헌신할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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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진정한 삶에 헌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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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온전한 순종의 영역
- 장윤석목사(하늘사랑교회) 창세기 1: 28절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문화명령’이라고 합니다. 이 명령은 우리의 순종의 범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은 교회 안에서의 순종을 넘어서 모든 창조의 영역 속에서의 순종이어야 합니다. 이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해도 온전한 순종이 아닌 반쪽짜리 순종에 그치고 맙니다. 우리는 자신의 직업과 일, 세상 속에서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 문화명령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컨대 공부하는 사람은 학문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여 연구함으로 그 영역을 발전시키는 것이 문화명령의 실천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죄악된 일, 거룩지 못하고 더러운 일, 피해야 할 일, 열등한 일,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로 생각합니다. 거룩한 일, 우등한 일은 교회 안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 좋은 사람들은 모두 교회 안에만 있으려고 합니다. 세상 일은 필요악으로 어쩔 수 없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일이 다 거룩한 일이며, 만인이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온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교회에서뿐 아니라 집에서, 부엌에서, 작업장에서, 들판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는 일(직업)이 하나님 섬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문화명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의 일상의 영역을 거룩하게 바꿉니다. 매일 매일 가장 좋은 고기와 뼈, 그리고 싱싱한 야채로 김치를 담는 소문난 곰탕집이 있습니다. 사장님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곰탕 설렁탕 장사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언제나 손님을 예수님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장사를 합니다. 좋은 뼈는 10시간을 고으면 뽀얀 국물이 나온답니다. 어느날 뼈를 고았는데 누런 국물이 나왔습니다. 뼈 가게 주인이 실수로 좋지 못한 뼈를 납품한 것입니다. 뼈 가게 주인은 사과하며, 커피 프림을 타면 뽀얗게 된다며 오늘만 그렇게 장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못 먹는 뼈도 아니고 맛도 큰 차이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재료가 나빠서 장사를 못하게 되었다는 안내를 붙이고는 문을 닫았습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충성입니다. 눈 속임하지 않고 주께 하듯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곰탕 설렁탕 파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 설렁탕집 사장님은 지방에 사는데, 매주일 서울에 있는 본 교회로 나간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는 미식가라, 뭐가 맛있다 하면 서울도 가고, 광주도 찾아갑니다. 밥 먹기 위해서도 이렇게 다니는데, 예배드리러 왜 못갑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이 모습이 예배에도 충성되고, 삶에서도 충성된 균형잡힌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분의 순종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곰탕을 팔면서도 순종하고 있습니다. 식재료로 더 맛있고 더 건강한 먹거리를 개발하여 삶을 풍성케 하는 문화명령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이 문화명령에 순종함으로 온전한 순종을 하는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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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온전한 순종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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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고속도로 휴게소와 교회
-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 지방으로 회의를 자주 다닙니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며 휴게소를 들렸습니다. 한때는 가장 붐비는 경부선의 명물이었던 곳인데, 낙후된 화장실과 급감한 차량 숫자에 놀랐습니다. 반면 돌아오면서 지나친 휴게소는 단순히 화장실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복합문화 공간이었습니다. 세월을 잊고 자리만 지키고 잠자면 불패의 고속도로 휴게소 신화도 깨어지는구나! 이전에는 휴게소 내 주유소는 값이 비싸 이용하지 않던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렴한 기름값에 기회가 되는대로 가득 채우는 곳으로 변신했습니다. 어떤 곳은 저렴한 가격에 경정비, 세차, 편의점, 카페, 택배 서비스까지... 이런 곳은 어김없이 그 넓은 공간이 차와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생존을 위한 변화가 있는 곳은 사람이 모이고, 잠자듯 세월을 잊은 곳에는 발걸음이 끊기는구나! □ 교회는 영적인 휴게소, 주유소와 같은 곳입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이 언제든 찾아와서 죄와 허물을 배설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더러워진 손을 씻고 세차를 하는 곳입니다. 성령의 기름을 가득 주유하고, 말씀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다시 힘내어 거룩한 대로를 달려갈 수 있도록 돕는 곳입니다.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영적 문화공간 역할도 합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잠자면 도태됩니다. ‘언젠가 좋아지겠지’ 하는 나태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안식과 채움을 줄 수 있는 영적 저장고가 되도록 예배와 기도를 살려내어야 합니다. □ 성도는 교회에 와서 성령의 기름을 주유하기 위해서 반드시 주유구를 열어야 합니다. ‘아멘’이 주유구를 여는 소리입니다. 설교와 기도, 찬양을 통해 은혜를 주실 때마다 큰 소리로 ‘아멘’ 하고 주유구를 열어야 합니다. 주님께 드릴 주유비가 있을까요? 오직 ‘감사’로 값을 지불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주님은 성령과 말씀의 기름을 예배를 통해 꽉꽉 채워 주십니다. 엔데믹 시대, 신냉전 시대, 곳곳에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이 커가면서 많은 이들이 불안해하고 지쳐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신부에게 신랑이 오듯이 주님이 오셔서 모든 수고가 그칠 날이 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떨어지니 등이 꺼졌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해 빛을 계속 밝혔습니다. 믿음은 밤이 깊을수록 밝게 빛납니다. 교회는 기름 채우는 곳입니다. 믿음의 등을 밝히고 거룩한 길을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교회에서 성령과 말씀을 가득 채워야만 지치지 않습니다. 급변하는 세상, 불확실한 세상에서 거룩한 길을 달려가기 위해서는 은혜의 기름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주유비는 오직 감사뿐입니다. 시작하면 가능해집니다. 사랑하면 예뻐집니다. 운동하면 건강해집니다. 교회 오면 은혜받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며, 감사와 아멘으로 성령의 기름을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예배와 기도의 우선순위를 다른 것으로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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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고속도로 휴게소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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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풍성한 삶
-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언젠가 누군가의 장기기증으로 6명이 '새삶'을 얻은 사례를 뉴스로 본 적이 있다. 의학 드라마를 볼 때, 한 번씩 장기기증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기도 했다. '장기기증'이라는 개념이 내 머릿속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해야지...'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왔던 것 같다. 이번 주 주일 설교 말씀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누구나 죽는다. 불사신은 없다. 영원할 것만 같은 삶의 모든 부품들이 다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죽으면 다 끝'이라면 삶의 가치는 저하되고, 삶의 목적은 무난하게 살다 가는 것이나 혹은 언젠가 사라질 것들에 메인 것이 되지 않을까. 하나님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이 글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목적은 사실, 내가 너무 사랑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인연 중 혹시라도 죽음에 대해 사색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믿는 이 소중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이다. 사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죽음이 무겁고 어두운 주제 같지만, 죽음 이후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확실히 믿기에 그리 두렵지는 않다. 본 적도 없는, 경험하고 온 사람도 없는 천국을 믿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안다. 그렇기에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가장 선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천국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막상 장기기증 서약을 하려고 실행에 옮기니 내 마음에 불안함이 생겼다. '내가 이 서약을 하는 순간 죽음이 내 코앞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서도, 사실 마음속에서는 이 세상을 더 살다가 가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토록 연약하다. 어쩌면 삶의 끝까지 넘어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할 예정이다. 주일 말씀을 참고하자면...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 너머의 영원한 구원과 우리 존재에 대해 생각지 않습니다." "죽음을 가까이 두게 될 때, 회개와 순종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성화가 촉진되며 하늘의 소망을 견고히 잡게 됩니다. " ?그래. 죽음을 가까이 둔 채로 살고자 하는 한 걸음으로, 주어진 시간들로 빛나고 풍성한 삶을 만들길 바라는 뜨거운 마음으로, 장기기증 서약을 해야겠다. 사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당장 부르시진 않으실 것이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기에! 그러나 분명하게 다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언제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서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자. 죽는 그 순간에도 장기기증으로 생명의 복음을 전하자. 내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잊지 말자. 주(註): 이 글은 ‘죽음, 그 이후’ 설교를 듣고, 장기기증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딸 아이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믿고 있는 바를 알리고자 소통하는 글을 본인의 허락을 받아서 올립니다. 고난주간,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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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풍성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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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내 편이 아니라도
-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요즘 대한민국이 위태로운 실정입니다. 구한 말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지도자들은 편을 나누어 대립하다가 일제 식민지라는 깊은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오늘은 한국은 미국과 중국을 양대 축으로 하는 신냉전, 북한의 핵무장 현실화, 경제 전쟁의 여파를 맞고 서 있습니다. 온 국민이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정치인들은 증오의 정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이 나라를 끌고 간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 오랜 세월 정치적 탄압을 받아 피신을 다닙니다. 그러다가 사울이 죽고, 유다 지파의 추대로 다윗은 왕으로 등극합니다. 드디어 다윗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힘을 가지게 되면 오만한 마음에 그 힘을 휘두르고 싶은 함정에 빠집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시험이 왔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시신을 생명을 걸고 찾아와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줍니다. 그때 누군가 다윗에게 이를 친절하게 고자질합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편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편이 아닌 야베스 사람들을 죽이거나 불이익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울에 대한 ‘신의’를 지킨 것을 높이 평가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다윗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신의’ 이구나. 내 편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의를 지킨 사람들을 축복하고 상을 주네, 신의를 지키면 다윗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그러면서 다윗에게 생명을 거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더 큰 가치를 인정해 주니까, 더 큰 민심을 다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용사들이 모이면서 다윗 왕국은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준 바로 세워야 합니다. 니편 내편 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적대 감정, 패거리 의식만 가지고 일을 하면 끼리끼리만 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이가!’를 외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지킬 가치는 사라지고, 우리 편만 가르는 현실은 미래를 암울하게 합니다. 자기편을 규합하기 위해서 분열을 야기하여 국가의 하나 됨을 방해하며, 함부로 떠드는 사람은 리더가 되면 안됩니다. 리더는 하나 됨을 이루는 자질을 가져야 합니다. 밝은 미래를 열어 보일 비전을 제시하면 됩니다. 어려운 시절에 나라를 니편 내편 적을 만들어서 유익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공동체를 위하는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방식 위에, 공동체를 위한다는 큰 가치가 동일하다면 서로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존중이 있을 때에 큰 틀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어려운 시대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12:18) 오늘 모두가 성경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가 만일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면, 편견을 버리고 소중하게 여기세요.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기뻐하시며, 덤으로 그와 같은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만남의 축복들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성숙한 공동체는 다윗의 왕국처럼 강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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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내 편이 아니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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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가시가 사랑의 흔적이 되다.
-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새벽에 알람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키는 절차는 매번 힘이 듭니다. 일단 핸드폰으로 찬양을 틀어놓고, 한참을 침대에서 누운 채로 운동하며 아쉬운 잠을 몰아냅니다. 요즘은 주로 사순 절기 찬양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흔적들을 묵상할 때마다 큰 은혜가 됩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의 흔적이 지나온 내 삶의 역경을 이겨내도록 하는 능력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프랑스 개신교인을 ‘위그노’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파리 비스콘티(Visconti) 거리에 프랑스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웠습니다.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의 날, 카톨릭 성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개신교인들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됩니다. 사흘 동안 파리에선 3천 명, 프랑스 전역에는 3만 명 넘는 위그노가 학살당합니다. 파리의 개신교회는 이날 이후로 대학살의 신호였던 종소리를 생각하며, 교회에서 종을 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을 의학적 용어로 ‘트라우마(Trauma)’라 합니다. 재난 후 생기는 심리적 상처이지요. 누구에게나 이런 트라우마(상처)가 있습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도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육체의 가시가 생활 속에서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사역에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그 육체의 질병을 ‘사탄의 사자’로 표현했습니다. 그 아픈 증세가 나타나기만 하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치료받기 위해서 세 차례나 작정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이렇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12:9) 예수님의 응답은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식과 열정과 동역자 등 더 많은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응답은 육체에 가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응답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울을 겸손하게 만드는 도구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겸손해지면 은혜가 유지되고, 더 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높여주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도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9) 라고 고백하며 약한 것들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능력임을 선포했습니다. 십자가는 약한 것이 능력이 되는 대표적 사건입니다. 고난과 수치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능력과 구원과 사랑의 십자가로 바꾸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가시는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가시를 은혜의 흔적으로 만드십니다. 그 흔적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흔적입니다. 지난날 저의 삶의 가시와 같았던 약함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 모든 약함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닌 육체의 가시, 트라우마, 삶의 고통과 아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가시’를 ‘십자가 사랑의 흔적’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사순절을 지나면서, 찬양을 듣든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드리든지, 말씀을 듣든지, 경건한 독서를 하든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자신에게 모아 보세요. 특별히 아프게 하는 ‘가시’가 십자가 사랑의 흔적이 될 때까지! 그때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보며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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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가시가 사랑의 흔적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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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신앙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 장윤석목사(하늘사랑교회)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루를 기도로 시작합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깁니다. 밤이 되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재리에 밝은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 이익이 되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돈을 버는 일에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저녁이 되면 자기의 육체적 즐거움을 위해 돈을 씁니다. 두 사람이 강에 들어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누가 고기를 더 많이 잡았을까요? 재리에 밝은 사람이 훨씬 더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기는 기도로 잡는 것이 아니라 기술로 잡는 것입니다. 재리에 밝은 사람은 고기를 잡기 위해 물살이 어떠한지, 어디에 고기가 많이 모이는지, 어떤 미끼를 써야 하는지를 부지런히 살폈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고기가 자신의 그물로 들어오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기도는 신앙의 문제이고, 고기잡이는 기술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은 사람보다는 기술이 좋은 사람이 고기를 잘 잡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은 신앙이 좋은 사람보다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요구합니다. 학생이 좋은 성적을 얻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신앙은 깊어지겠지만 성적은 안 나옵니다. 기도는 신앙의 문제이고, 성적은 기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은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기술도 경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으로 열심히 기도했으면, 기도한 방향대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일을 안 하거나 일을 잘하지 못하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기도만 하고 사과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성경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은 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공부 잘하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기도로 공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돈을 벌고 싶다면, 돈 버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일을 열심히 잘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이 일만 열심히 하면 육체의 열매만 거둘 뿐이지만, 신앙으로 열심히 일하면 성령의 열매, 영생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8)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일하는 사람 중에 역사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열심히 일하여 뭔가를 이룬 후에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룬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유지하고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겸손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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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신앙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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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무슨 일이든지 마음 먹기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는 하지 못할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냅니다. 반면 하려고 하는 마음을 먹으면 해낼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 어떤 역도 선수의 한계는 200㎏ 입니다. 아무리 해도 201㎏, 그깟 1㎏을 더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코치가 200㎏과 201㎏ 역기를 나란히 놓고 들도록 했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200kg은 들었지만 201㎏는 들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들어 올린 것은 201㎏ 역기였습니다. 코치가 숫자를 바꿔놓은 것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한계가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문제는 마음먹기가 힘듭니다. 이미 마음에서부터 자신의 한계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도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그 선에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선을 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별명은 ‘히브리’ 사람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강을 건너다’는 뜻입니다. 즉 ‘히브리 사람’은 강을 건너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강을 건넌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라는 애굽과의 경계선을 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이전의 자신은 죽었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 도무지 넘을 수 없었던 강(선)을 건넌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영 새마음을 받았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한계를 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 휴식 시간에 잠깐씩 ‘응답하라 1988’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을 새록새록 추억하며 그땐 그랬었지하며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등장인물 중에서 ‘김정봉’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심장이 약해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렇게 살아서 뭐가 되겠나’ 싶을 정도로 엉뚱합니다. 정작 해야하는 공부는 하지 않고, 다른 일에는 몰입하다 보니 7수 만에 겨우 법대에 갑니다.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기뻐합니다. 기쁨도 잠시, 요리로 인생의 승부를 걸겠다며 사법고시 준비를 접고 집 앞 치킨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엉뚱하고 모자란 듯 하지만,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주관이 뚜렷합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학생과의 연애에도 성공합니다.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캐릭터입니다. 가장 뒤쳐진 듯하지만 사실 가장 앞서가는 캐릭터입니다. 사람의 머릿속에는 하루에 5만 가지 생각이 스쳐 간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무엇이든지 참된 것을 생각하라”는 빌립보서 4장 8절 말씀처럼 생각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습관을 한 번 바꾸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 먼저 새벽기도를 드려봅시다.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해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됩니다. 고난 조차도 마음 먹기에 따라서 선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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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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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온 세대가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축복
- 예배는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와 축복을 예배를 통하여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복된 인생으로 변화를 입습니다. 앤드류 존슨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13살부터 양복점 점원으로 일하고, 18살에 구두 수선공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무학인 그는 아내에게 글을 배웠습니다. 이후 열심히 공부해서 독학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땄고, 주지사, 상원의원, 부통령을 거쳐, 17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반대하던 사람들은 초등학교도 못 다닌 양복쟁이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며 조롱 섞인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모든 지혜와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알래스카를 소련으로부터 720만 달러에 사들였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얼음으로 덮인 쓸모없는 땅을 뭐 하러 사는가. 무식한 대통령이 하는 짓이 그렇지 뭐 별수 있느냐며 비아냥거렸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 땅의 가치를 몰랐지만, 이것이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출신과 학력,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홍수 때 방주를 준비한 노아, 우상을 만드는 집안의 아브라함, 사기꾼 같은 잔꾀의 명수였던 야곱, 노예로 팔려가 종신 감옥의 죄수였지만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 나일강에 버려진 아기였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된 모세, 개처럼 취급받던 이방인이지만 유다 지파의 족장이요 가나안 정복의 영웅이 된 갈렙, 부모와 형제들에게 무시당하다가 왕이 된 다윗, 포로로 끌려간 소년이었지만 바벨론에서 총리가 된 다니엘 등 헤아릴 수 없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을 만나면 놀랍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리호수에서 밤새 그물질하며 어부 생활로도 변변찮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된 후에 위대한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살인자요 박해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세계 역사와 문명과 영적 세계를 바꿔버린 사도 바울, 그리고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들 등 그 이름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이름 속에 나의 이름이 들어가고 바로 나의 자녀들 이름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온 세대가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비전을 선포하고 도전합시다. 하나님께서 성취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4:7)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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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온 세대가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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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믿음으로 선포하고 도전합시다
-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미국의 풍자 문학가 마크 트웨인의 소설 중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17세기 미국 런던 가에 두 아이가 태어납니다. 하나는 빈민가에서 자라서 소매치기 거지가 되고, 하나는 왕의 아들로 태어난 왕자입니다. 소년으로 자란 이 둘은 우연히 만나서 서로 역할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거지는 평생 왕자처럼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왕자는 왕궁에서 벗어나서 맘대로 다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꾸었는데, 누가 더 힘들었겠습니까? 왕자는 아무나 못 합니다. 손 씻고 먹어야 하고, 공부하는 척해야 하고, 뭘 하나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더기 같은 허물과 죄의 옷을 입었던 자입니다. 그랬는데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경 벧전 2장에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분이 바뀐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왕의 자녀가 되었지만, 옛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분을 갖춘 우리의 행동 기준은 이제 하나님 말씀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변함없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하고, 읽고 듣고 쓰고 낭독하고 암송하며 실천합시다. 하나님 말씀으로 은혜를 받아서 옛사람의 옷은 벗고, 새사람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길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을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롬 12:1) 우리는 어느 때보다 힘든 격량의 시기에 한 해의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라면 축복의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통하여 2024년도 “선포하고 도전하라”라는 표어를 정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내 앞에서 평지가 될지어다!” 선포하고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믿음으로 첫 돌을 놓을 때,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14일간 ‘신년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하여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선포합시다. 2024년도가 축복의 시간으로, 축복의 땅으로 열릴 것입니다. 오늘 신년 감사주일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따라서, 믿음으로 뜻을 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뜻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일 선포하며 실천하여 나가길 바랍니다. 2024년도 축복의 시간 속으로, 축복의 땅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스가랴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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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믿음으로 선포하고 도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