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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산을 넘어서
어떤 여인이 8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중 3명은 청각장애, 2명은 시각장애, 1명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홉 번째 아기를 임신 중이지만 성병에 걸려있습니다. 다수의 사람은 ‘낙태해야 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음악 천재 ‘베토벤’입니다.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투표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3명의 후보가 있습니다. 후보 A :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적이 있고, 두 명의 부인이 있으며,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8~10병의 마티니를 마신다. 후보 B : 두 번 회사에서 잘린 적이 있고,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 시절 마약을 복용한 적 이 있고 위스키를 즐겨 마신다. 후보 C : 전쟁 영웅이다. 채식가였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 맥주를 가끔 마신다. 불륜관계도 가져본 적이 없다. 당신은 어떤 후보를 택하셨습니까? 후보 A는 루즈벨트, 후보 B는 윈스턴 처칠, 후보 C는 아돌프 히틀러라고 합니다. 선입견(편견)은 인간이 가진 못된 생각입니다. 편견으로 사람을 대하다가 실수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면 가난한 집 아이가 먼저 의심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은 사람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볼 것을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정오에 기도하던 중, 보자기에 가득 담긴 부정한 것들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먹으라 했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부정한 것은 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내가 깨끗하게 했으니 먹으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그들에게로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Ice breaking - 얼어붙은 생각, 즉 편견을 깨뜨리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편견을 깨뜨리고 고넬료의 집으로 갔을 때,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수백 년 동안 편견으로 인한 멸시와 차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찾아가셨고,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10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후에 그에게 감사한 유일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찾으신 사건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야 합니다(행1:8). 사마리아는 유대 땅과 가장 가깝지만, 편견 때문에 땅끝보다 멀고 어려운 곳입니다. 가깝지만 오히려 더 멀고 불편한 사마리아 같은 관계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품고 넘어서면 땅끝까지라도 갈 수 있습니다. 더 깊고 풍성한 관계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런 관계를 품고 넘을 수 있다고 격려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처럼, 오히려 사마리아인이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편견을 깨신 분입니다. 결국 내 안에 수많은 편견도 예수로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 바람, 성령 바람으로 편견과 오해를 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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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만남과 이별을 대하며
만남과 이별을 대하며 새 가족 등록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만남이 많다는 것은 목사로서 행복입니다. 가수 노사연 씨의 ‘만남’이란 노래 속에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솔직히 가사가 여기까지 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남 속에 우연은 없습니다. 만남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우린 부모님과의 최초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죽고 난 후에 눈을 뜰 때, 영원한 존재들과 새로운 차원의 만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만남은 설렘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만남 뒤에는 이별이라는 그림자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우릴 아프게 합니다. 부모도,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사랑하는 연인과의 만남도 예외는 아닙니다. 살면서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사람이나 환경을 처음 대할 때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지나친 애착으로 이별을 감당치 못해서도 안 됩니다. 만남과 이별에 너무 무관심해도 안 되고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기에 우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전제는 만남과 이별 속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도 만남의 축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만남이 축복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하고 노력이 뒤따라야 하고 투자해야 합니다. 무관심과 이기심은 불행한 이별을 낳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별도 있지만 대부분의 이별은 노력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멀리서 사는 친척이나 친구와 전화 한 통 없이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결국 멀어지고 만남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별 속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에 반드시 손해만은 아닙니다. 이별은 아쉽지만,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준비이며 서로를 위한 하나님의 선이기에 축복하며 보낼 수가 있습니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만남이 축복되고, 이별이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보다 야망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행복했지만, 이별은 언제나 아팠습니다. 만남과 이별이 반복될수록 그런 감정이 무뎌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만남은 행복하고, 이별은 아쉽고 아픈 것은 아직 미숙해서일까요? 그래서 나름 터득한 방법이 있다면, 헤어질 때 인사를 잘하는 것입니다. “어딜 가든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그리고. “다시 만나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큰 복은 없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두 번의 교회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라 아팠고, 또 다른 사정으로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헤어지는 인사를 잘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곳에서 다시 만납시다” 참석한 교우들과 함께 찬송도 불렀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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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 개는 입으로 말을 못 합니다. 그래서인지 개는 사람에게 눈으로 말합니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새까맣고 큰 눈으로 주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반가움을 표합니다. 식사 때면 발치에 앉아 눈으로 ‘뭐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물론 식탁 밑 그 눈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집에서 나 혼자인 것 같기는 하지만요. 동물과도 눈으로 무언의 대화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데, 사람 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눈으로 말해요.?살짝이 말해요.?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눈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단둘이서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눈빛으로 전 세계를 울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사나 사진에 수여하는 퓰리처상이 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인물의 눈망울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큰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지선 교수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간증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대학생 시절 교통사고로 몸의 55%를 3도 화상을 입고, 40번의 대수술을 거치고서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한 화상으로 얼굴은 다 녹아내리고, 양손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은 다 절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굳이 다시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녀의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게 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눈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고 후 병원으로 옮겨져 화상 수술을 받고, 얼굴을 돌돌 감고 있던 붕대를 처음 풀던 날의 경험을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얼굴을 본 엄마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어요.”?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여전했다는 것. 한 존재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얼마나 그 존재에게 안정감을 주고 자존감을 부여하는지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은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집에 누워 있는데, 부인이 빨래를 개라고 시켰답니다. 자신은 암 환자니까 이제 그런 일을 안 시킬 줄 알았답니다.?‘나 환자잖아~’?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산더미 같은 빨래를 자기 앞에 밀어주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뛰어가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아이는 호들갑 떠는 부모를 보는 순간 울음보가 터집니다. 그러나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면, 자기도 대수롭지 않은 듯 스스로 털고 일어난다고 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약하고 서툰 못난 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안정감은 나를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입니다. 그 눈빛을 느껴본 사람은 편해집니다. 그 안정감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잔잔히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빛입니다. 여러분, 느끼십니까! 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찬양을 불러보세요.?“하나님,?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그 사랑의 눈빛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면, 자녀는 안정감을 가지고 꿈을 향하여 도전할 것입니다. 그 눈빛으로 교인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안정감을 가지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눈빛만 보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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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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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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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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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역경의 시대 - 서로 위로하라
-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누가 내게 천사의 존재를 믿느냐고 묻길래, 확실히 믿는다고 했어”. 아내는 “왜 그렇게 생각해?”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의 대답이 멋집니다. “여기 한 명 있으니까”. 이렇게 부부가 서로 위로하며 힘든 시기도 극복해 나가야 하죠. 요즘 천사는 야단도 잘 치지만 천사는 천사입니다. 몸의 병으로 아픈 분도 있지만,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분들은 더 많습니다. 몸에 상처가 생기면 약 바르고 치료하듯이, 마음의 상처도 위로의 약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위로의 약이 필요한 분들이 많습니다. 어디서 위로받고 상한 마음을 치유 받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위로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위로하십니다. 경치 좋은 자연 속을 거닐면 힐링이 되지요. 그 이유는 자연 속에 창조주의 성품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생존을 위해 오곡백과뿐만 아니라 꽃도 지으셨습니다. 그 꽃을 보며 위로받으라고요. 또 누군가를 찾아가서 위로하라고요. 이제 추운 겨울날 눈이 오면 함박눈을 맞으며 창조주의 위로를 느껴 보세요. 하나님은 더 확실한 위로를 말씀을 통하여 주십니다. 성경을 읽으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음과 불행을 경험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다면 교육을 받아도, 환경을 바꾸어도 죄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값을 다 치르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죄에서 해방되고 행복과 위로를 받길 원하십니다. 혹시 인생의 역경의 때를 지나며, 낙심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시편 42:5 말씀을 붙드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혹시 두려움이나 불안함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사야 41:10 말씀을 붙드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혹시 인생의 혹독한 외로움을 경험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히브리서 13:5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역경 중에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릴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위로를 얻고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역경의 시대를 살고계신 여러분!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믿음을 가지시고, 그 믿음으로 서로 위로하며 역경의 시대를 함께 이겨나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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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역경의 시대 - 서로 위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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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역경의 시기에는, 중심을 바로 잡으라
- 오뚝이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 이유는 바닥에 무게중심(쇠뭉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오뚜기와 같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삶의 중심에 가장 귀하고 무거운 것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으로 중심을 잡고 있으면 역경의 바람에 넘어졌다가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이 없는 인생은 이리저리 날뛰다 넘어지면 절망, 포기, 실패로 끝나 버립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느니라(잠24:16) 성경이 말씀하는 의인은 실수나 실패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면 다시 일어섭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명보다 무게가 훨씬 가벼운 재물과 명예, 어떤 직위 등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것을 의지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언제든 역경의 바람이 불어오면 날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성, 감정, 학벌, 인생의 경험조차도 새털처럼 가벼워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 삶을 중심 잡고 지탱하려고 하면 생명보다 가치 있고 무거운 것이어야 합니다. 생명보다 귀한 존재는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역경의 바람이 불어올 때는 중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 역경의 시간은 교회가 중심을 바로잡는 시기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을수록 교회는 중심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본주의, 물량주의, 세속주의 중심이었다면 중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중심만 바로 잡는다면 세상이 어려울수록, 교회는 일어나 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역경의 바람에 지치고 상한 사람들을 끌어안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한계에 부딪혀 절망하는 분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람 링컨은 중요한 도전에 27번 실패했다가 28번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완전 오뚜기입니다. 그의 삶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그 많은 실패를 경험하고도 중심 잡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큰 그림을 그의 삶으로 그렸습니다. 중심을 바로 잡는 것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역경 속이라도 하나님과 말씀으로 중심 잡고 서면, 하나님께서 역경을 돌파하며 나갈 길을 여십니다. 역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실패도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도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이 범죄한 후에 땅이 엉겅퀴와 가시를 내게 되었습니다. 엉겅퀴와 가시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 엉겅퀴가 간에 좋아서 약재료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찔레(가시)도 그 속에서 신경안정 물질이 추출되어 약이 된다고 합니다. 중동의 사막은 죽은 땅입니다. 그러나 파보니 석유가 펑펑 나왔습니다. 대박입니다. 하나님은 엉겅퀴와 찔레도 약이 되게 하십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아도 중심을 바꾸면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 삶을 지탱하고 있는 중심이 무엇입니까? 바람 불면 날아갈 수 있는 것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다면 중심을 바꾸세요. 2022년 한 해를 시작하며, 하나님과 말씀으로 중심 잡고 출발합시다. 비록 역경의 시간이라도 돌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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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역경의 시기에는, 중심을 바로 잡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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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새 시대를 열어갈 우리 교회를 생각하며
-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특징 중에 하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를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이 사랑하게 되면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집니다. 누가 막아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날 것입니다. 성도는 환경이 어려워도 예배와 성도의 교제로 모이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흥하는 교회는 사람들이 자꾸 모입니다. 참 신기한 것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도 전체가 하나가 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16개국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저는 경상도 사람이지만, 우리 교회는 호남, 충청, 강원 전국 각지에서 오신 성도님들이 많습니다. 저의 표준말(?)이 구수해서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칭찬들 하시니, 성령님의 역사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호남에서 오신 성도님들은 특히 음식 맛을 잘 내십니다. 호남은 곡창지대가 많아 예로부터 먹거리가 풍성해서 음식 맛도 좋습니다. 덕분에 교회가 더욱 행복합니다. 코로나가 끝나고 함께 먹을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길 고대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경상도에 큰 흉년이 있었습니다. 경남 진주사람 이자익이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곡창지대에 가면 굶어죽지는 않겠지 해서 전북 금산에 가서 조덕삼이란 큰 지주의 집에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워낙 부잣집이라 미국 선교사가 이 집 문간방에 세를 얻어 살았습니다. 선교사가 집안 사람들을 전도하다 보니까 주인 조덕삼도, 머슴 이자익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금산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점점 성장하여 장로를 세우는데 당연히 조덕삼이 장로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머슴이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머슴은 장로, 지주는 집사, 이 반전의 현실 앞에서 교회가 곧 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반전에 또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조덕삼이 시험 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머슴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대단한 것이구나 신분에 차별이 없고 머슴이 장로가 되고 지주가 섬기고 대단하구나’ 이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자익이 신학교를 갔는데, 금산교회가 다 밀어주고, 졸업 후에는 교역자로 청빙하여, 머슴이었던 목사를 잘 따르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자익 목사도 당연히 훌륭했겠지만, 조덕삼은 더 훌륭한 분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 하나 됨의 뒤에는 반드시 조덕삼 같은 희생과 섬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과 섬김이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바로 성령과 말씀의 은혜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 은혜에 목말라 하는 분들이 모여서 성령과 말씀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이 열어주실 새시대를 감당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누가 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을 싫다고 거스리겠습니까!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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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새 시대를 열어갈 우리 교회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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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내가 세상의 빛이로다 I am the Light of World
- 나의 유년기는 항상 희미했다. 안개 속을 걷는 듯했다. 아빠는 일곱 살 무렵 눈을 자꾸 찡그리는 나를 안경점에 데려 가셨다. 초고도 근시. 엄청난 두께의 안경을 쓰고서야 밝은 세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결혼식 첫날 밤, 목사님 말씀으로는 뺑글뺑글 안경을 쓰고 낯선 여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속아서 결혼을 했다고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시곤 한다. 2014년 4월 라식 수술을 하고 33년을 썼던 안경을 던져 버렸다. 안경 없이 밝은 아침을 맞이하는 감격을 잊을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는 어떠했을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소외 받고 버림받았으며 죄로 인해 저주받은 자의 삶은 참혹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소경을 통해 일하셨다. 육신의 눈도 뜨게 될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사망의 그늘 아래 있던 영혼이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알고 영혼의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약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의 비밀은 알면 알수록 역설이다. 막내 아이가 학교에서 기르던 봉숭아를 집으로 가져왔다.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잘 자라는가 싶더니 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시들시들 곧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내가 뜻밖의 말을 했다. “잎은 떨어져도 줄기는 튼튼해요. 괜찮아요.” 괜한 미련을 가지고 있다가 죽어버리면 실망할까봐 몰래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포기하지 않고 물을 주더니 드디어 꽃이 폈다며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작고 연약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꽃을 피우는구나. 죽을 것만 같고 더 이상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포기한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합리화하면서, 때로는 다른 사람을 향해 원망의 화살을 던지면서 나를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가신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원하신다. 말씀의 통로로 쓰임 받는 삶은 축복이다. 그러나 형통한 길만이 축복인가? 그렇지 않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축복은 물질도 사람도 환경도 아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가는 것이다. 많은 수의 상담자들은 깊은 상처와 치유를 경험한 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삶 가운데 힘든 역경이 없었다면 내담자의 아픔을 진실하게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현실을 선물로 주시고, 감당할 힘을 주시고, 현실을 통해 당신을 더욱 알아가게 하시며 더 나아가 세상에서 나와 같은 영혼들을 살리시기를 원하신다.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으로 오신, 유일한 소망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2021년을 마무리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늘사랑의 교회 김기남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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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내가 세상의 빛이로다 I am the Light of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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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성탄절의 의미를 새기며
- 성탄절의 의미를 새기며 1. 성탄절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 하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는 어떤 한 인간에게 신적인 능력이 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땀 냄새 나는 육신을 입고, 고통을 느끼며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2.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독생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분이며 그분과 하나이십니다. 그래서 선언하길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린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알게 됩니다. 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참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마1:23),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편하고 좋은 이유는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동일한 고통을 겪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같은 입장에 서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입장에 서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입니다. 인간의 문제가 하나님 자신의 문제가 되었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불행과 죽음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어떻게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 안에 함께 하시며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4. 성탄절에 사람들이 할 일은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일입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인 ‘에어포스 원’이라는 영화를 보면, 미국 대통령 전용기가 괴한들에게 납치됩니다. 대통령은 납치된 비행기에서 탈출해 근처를 지나던 수송기로 갈아타게 됩니다. 이때부터 평범한 수송기가 ‘에어포스 원’이 됩니다. 대통령이 탔기 때문입니다. 비행기의 기종이나 성능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천여 년 전, 첫 번째 성탄의 소식은 천사에 의해 베들레헴 주변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성탄의 소식을 듣고 달려간 곳에는 가축의 구유(여물통)에 누인 아기가 있었습니다. 그날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경배 드린 목동들이나, 아기를 따뜻한 방에 누일 곳이 없었던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는 모두 유대 사회의 ‘주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예수님이었기에 이들은 역사의 변두리가 아닌 중심에 서게 됐습니다. 혹시 예수님을 삶의 변두리에 두셨다면 이번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가치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영원한 생명과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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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성탄절의 의미를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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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염려마세요.
- 학생들의 전면등교로 인하여 지역사회에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확진자와의 직간접 접촉으로 많은 분들이 염려와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저희 가정도 자녀들이 학교에 다녀오면서 벌써 2주째 코로나 때문에 염려되는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감기 기운까지 있어 안전을 위해 선제적으로 자가격리 조치 후 주일예배를 다른 분에게 맡겼습니다. 초청받은 임직식 순서도 전화로 양해를 구했습니다. 다행히 진단검사 결과 음성이 나와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홀로 앉아 기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숨쉬는 순간, 모든 것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일 할 수 있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충성하겠습니다. 예수님!’ 그것도 잠시 어제 토요일 아침에도 자녀가 밀접 접촉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새순교회 행사가 있어 출타했다가 아침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역시 급하게 양해를 구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주일을 앞두고 있기에 가족이 다 검사를 받고 주일 아침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생각이 복잡해졌습니다. ‘주일예배를 어떻게 하나? 죽을병도 아닌데 목사가 강단을 비우다니! 내가 접촉자도 아닌데 그냥 설까? 아니야~혹시라도 확진이 나오면 교회가 힘들어져! 며칠간 누구와 만났지....미안해서 어떻게 연락하지?... 아~음성 나와야 할텐데, 하나님~긍휼히 여겨주세요. 정말 열심히 할게요~’. 아무것도 안 하고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픈 것보다 더 큰 염려는 ‘나 때문에.... 미안해서 어쩌지’입니다. 겪어보신 분들은 공감하실 겁니다. 바이러스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리지 않습니다. 확진되었다는 것도 힘든데 자책감과 미안한 마음이 더 힘들게 합니다. 누구든 감염될 수 있습니다. 이웃 편의점에서도, 식당에서도, 미장원에서도, 학원에서도, 교회에서도 어디서나 옮길 수도 있고, 옮을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 가해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웃을 배려하며 조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힘듭니다. 말 그대로 ‘위드 코로나 시대’입니다. 바이러스는 늘 곁에 있습니다. 이제 확진된 이웃을 향한 마음을 좀 더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지인 중에는 고의로 옮길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 때문이라는 비난이나 원망을 하지 않기로 합시다. 누군가 염려하고 있다면, ‘음성 나올거예요. 염려마세요’ 라는 말보다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염려 마세요’ 라고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오래된 주일학교 찬양이 생각납니다.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주의 은혜 나누면...’ 자주 불렀는데 아시죠? 그 곡의 2절 가사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뭐라 말할까. 그때에는 부끄러움 없어야지. 우리 서로 사랑해.” 이 코로나 난리통은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끝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나는 안 걸렸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기뻐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그동안 돌아보아야 할 자를 돌아보지 못하고, 이웃을 원망하고 미워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숨길 방법을 찾고 있을까요.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본분도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으며, 허다한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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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염려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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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대림절, 성탄의 불을 밝히며
-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 강대상에도 두 번째 촛불이 불을 밝혔습니다. 지난주에는 교회 외벽을 이용한 성탄 조명 장식을 하고 점등식을 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암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웃들을 향한 희망의 빛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 빛을 보는 사람마다 우울한 감정이 사라지고 살고 싶은 생의 소망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 빛이 주는 메시지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잠시 생각해 봅니다. 아기 예수를 잉태하여 만삭이 된 마리아와 그와 정혼한 요셉은 호적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팍팍한 삶이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의 인심도 팍팍해집니다. 오랜 식민지 생활로 삶이 고단해서인지 만삭이 된 이들 일행을 위하여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저들을 맞아들이겠지’ ‘우리는 형편이 안 돼’ ‘낯선 사람을 맞아들였다가 불쾌한 일에 연루될 수도 있어.’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천여년 전 베들레헴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짐승이 머무는 헛간에서 예수님은 탄생하셨고, 아기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짐승의 구유에 누여졌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성탄절의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극장에 화가들이 개봉 영화 주요 장면을 큰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놓고 홍보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다니던 교회도 화가가 있어서 12월이면 예수님 탄생과 관련된 성화를 강대상 배경으로 크게 그려놓았습니다. 그림의 단골 내용이 구유에 누인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마당이나 로비에 마구간 소품을 전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 그림이나 소품을 지나며 성탄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에,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한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그 예수님이 찾아오실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풍요로워 보이지만 우리 사회의 이면에는 아직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작업장에서 끼어 죽고, 깔려 죽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차가운 바닷물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며, 학대를 받아 죽음을 맞이한 아기, 죽음조차 방치되어 수개월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는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텅빈 가슴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깜깜한 베들레헴의 밤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목마른 자에게, 옥에 갇힌 자에게, 배고픈 자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곧 예수님 자신에게 베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시인은 “문이란 문은 모두 두드려,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안부를 묻고 싶다. 그리고,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고 모두에게 갓 구운 빵 조각을 주고 싶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통로로 하여 사람들에게 찾아오십니다.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우린 남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그런 마음에는 예수님이 오실 수도 거하실 수도 없습니다. 대림절 성탄의 불을 밝히며, 예수님이 오셔서 거하시고 일하실 수 있는 거처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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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대림절, 성탄의 불을 밝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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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벽에 걸린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며...
- 마지막 한 장 달랑 남아 있는 2021년도 달력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벽에 걸린 달력처럼 내 인생이 한 달만 남았다면 나는 어떤 자세로 남은 삶을 살게 될까? 적어도 후회함이 없도록 남은 시간을 소중히 대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인천에서 가장 장수하셨던 110세 장로님의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곧이어 교회 건축할 때 목수 일을 해 주셨던 집안 형님의 절망적인 암 진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생은 한 달이 되던, 일 년이 되던 시한부입니다. 인생 너머 영생이 있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과 영생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하기에 남은 인생은 더욱 소중합니다. 영생에 비하면 인생은 달력 한 장처럼 짧지만, 그 시간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마음 다하고, 힘 다하고, 목숨 다하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삶의 열정(Passion)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들입니다. 열정 없이는 위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위대한 그림, 음악, 드라마, 건축물 뒤에는 제작자의 열정이 숨어있습니다. 열정이 있을 때 모든 것이 위대하게 만들어집니다. 그렇다면 나의 삶에 열정을 더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젠가 읽었던 ‘내 인생 마지막 한 달’ 이란 책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첫째, Abundant life(풍성한 삶)에 도전하라. 열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열정적인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풍성한 삶’을 목표로 주셨습니다. (요10:10) 항상 지금보다 더 풍성한 삶을 위해 노력하십시오. 하워드 덜만(Howard Thurman)의 말처럼 세상이 원하는 것을 묻지 말고 자신을 의미 있게 살아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실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Someday Syndrome(언젠가 증후군)에서 벗어나라. 열정적인 삶에 가장 큰 적은 ‘언젠가 증후군’입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눅 13:32∼33)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향해 지체함 없이 가시던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에게 ‘언젠가’란 없었습니다. 사탄은 언젠가를 좋아하지만, 주님은 지금을 좋아하십니다. 셋째, Ridiculous Change(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하라. 우리의 일정에서 한두 가지 바꾼다고 우리의 삶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정말 삶을 풍성하게 하기를 원한다면 당장 획기적인 변화에 도전하십시오.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팔매를 들고 달려가듯, 중풍 병자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듯… (눅 5:18∼20) 이런 자세로 하루하루를 산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풍성해질까요? 벽에 걸린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며, 남은 삶을 다짐해 봅니다. 사랑으로, 사명으로, 은혜로… 삶의 열정을 가지고! 오늘은 교회에 오면서, 건널목 초록 불 숫자가 10이 남았을 때 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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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벽에 걸린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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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 21일간 다니엘 기도회에서 많이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귀에서 맴돌고, 입에서 흥얼거립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은혜란 내게 찾아온 어떤 것도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어떤 것이 은혜임을 아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사가 밀려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피조물에게 당연할 수 없는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과학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극장이라”라고 말한 것 같이, 세상의 존재 그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대통령과 알고 지내는 것도 대단한 일일진대,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과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는 생명으로 연결된 것이 어찌 당연한 일일까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런던에는 주일이면 이리저리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답니다. 예배를 볼 자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시내 곳곳 교회마다 자리가 꽉 차 예배드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만에 런던 시내 대부분의 예배당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 언론인이 영국의 목회자, 신학자, 사회학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그중에 아흔이 넘은 신학자가 한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은혜로 주어진 것들을 잃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은혜를 호의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베푸시는 하늘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 그동안 베풀어 주신 하늘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하나님의 은혜인데,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면 은혜가 중단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풍성한 가을에 오곡백과라는 결실이 나오기까지 농부의 수고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기름진 땅, 좋은 씨, 햇빛, 비, 적당한 기온 등은 농부가 제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어쩌면 농부의 수고는 작은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지난주 자녀들이 수능을 치렀습니다. 수험생의 수고는 농부와 수고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작은 부분입니다. 그 작은 부분 안에서 실수하고 뜻대로 안 된 것에 대해서 너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수고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자녀들을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기입니다. 주시는 모든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은혜로 받기를 원합니다. 인간관계에도 은혜가 임하면 원수도 불쌍히 보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조촐한 식사도 하늘의 만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은 감사입니다. 기독교는 사은의 도입니다. 기독교인의 모든 선한 일은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면 은혜 위에 은혜가 강물처럼 임할 것입니다. 다시 마음속에 새기렵니다. 아무것도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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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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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첫사랑 이야기
- 첫사랑 이야기 설교 10분 안에 교인들을 잠재우는 은사가 있는 어느 목사님은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집중하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했습니다. 어느 날 유명 강사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강사님이 설교의 시작에 “저의 첫사랑은 지금의 저의 아내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자, 청중들은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내 곁에 없지만 아직도 그 품이 그립습니다” 라는 말에 긴장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저의 어머니입니다” 라고 하자, 청중들은 웃음보를 터뜨리며 한 사람도 졸지 않고 설교에 집중했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바로 저거야~’ 하고는, 다음 주일 설교를 “제게는 첫사랑이 있었습니다” 로 시작했습니다. 졸렸던 사람들이 집중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녀의 가슴이 그립습니다” 라고 하자, 사람들이 술렁이며 더욱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낯선 반응에 당황한 나머지 ‘그녀는 저의 어머니’ 라는 멘트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기나긴 침묵 후, 대형 사고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잠만 깨워놓고 수습이 안 된 것입니다. 이처럼 첫사랑 이야기는 졸던 잠도 깨웁니다. 여러분의 첫사랑은 누구인가요? 아마 지금 사랑이 첫사랑이라고 대답하겠죠^^ 신앙 세계의 첫사랑은 무엇일까요?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은혜로 감격스러웠던 순간들! 우리 신앙의 힘은 거기에서 나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청년 때에 신앙의 처음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주님은 제게 여러 가지 영적인 체험을 주셨습니다. 구름 위를 걷고 있는지 땅을 딛고 서 있는지 모를 정도로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찬양 가사처럼 꽃들도 새들도 산들도 함께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기도 시간이 좋아서 밤늦게 기도 배낭을 메고 부산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산꼭대기 바위틈을 찾곤 했습니다. 많은 회개를 했었고, 소년 때의 서원을 다시 꺼내게 되었습니다. 교회 일이라면 무엇이든 ‘아멘’으로 섬겼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이 이런 것임을 그 사랑 안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주님과의 관계에서 첫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그 첫사랑을 잃어버릴 때 삶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앉아서 예배는 드립니다. 헌금도 드립니다. 종교적인 책임은 다하는데 감동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지겹고 불만스럽고 힘이 듭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으로 연합한 관계입니다. 관계에 금이 가면 수고하고 봉사해도, 그것이 무거운 짐이요 피곤한 일이 됩니다. 모든 사역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교회는 게으르지 않으려고 열심이었지만,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노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 그러므로 회개하고 돌이켜 너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계2:4-5) 추억 여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부생활을 하다가 애정이 식고 의리와 책임만 남아 탈진될 때 연애 시절 그 거리 그 찻집을 찾아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여행이죠. 우리 신앙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힘들고 지쳐서 탈진이 찾아올 때 우린 주님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날 위해 고난 받으시고 생명 주신 진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처음 그 사랑을 회복하시고 예수님과 깊은 연합이 있으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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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첫사랑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