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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개는 입으로 말을 못 합니다. 그래서인지 개는 사람에게 눈으로 말합니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새까맣고 큰 눈으로 주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반가움을 표합니다. 식사 때면 발치에 앉아 눈으로 ‘뭐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물론 식탁 밑 그 눈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집에서 나 혼자인 것 같기는 하지만요. 동물과도 눈으로 무언의 대화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데, 사람 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눈으로 말해요.?살짝이 말해요.?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눈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단둘이서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눈빛으로 전 세계를 울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사나 사진에 수여하는 퓰리처상이 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인물의 눈망울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큰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지선 교수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간증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대학생 시절 교통사고로 몸의 55%를 3도 화상을 입고, 40번의 대수술을 거치고서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한 화상으로 얼굴은 다 녹아내리고, 양손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은 다 절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굳이 다시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녀의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게 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눈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고 후 병원으로 옮겨져 화상 수술을 받고, 얼굴을 돌돌 감고 있던 붕대를 처음 풀던 날의 경험을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얼굴을 본 엄마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어요.”?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여전했다는 것. 한 존재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얼마나 그 존재에게 안정감을 주고 자존감을 부여하는지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은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집에 누워 있는데, 부인이 빨래를 개라고 시켰답니다. 자신은 암 환자니까 이제 그런 일을 안 시킬 줄 알았답니다.?‘나 환자잖아~’?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산더미 같은 빨래를 자기 앞에 밀어주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뛰어가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아이는 호들갑 떠는 부모를 보는 순간 울음보가 터집니다. 그러나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면, 자기도 대수롭지 않은 듯 스스로 털고 일어난다고 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약하고 서툰 못난 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안정감은 나를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입니다. 그 눈빛을 느껴본 사람은 편해집니다. 그 안정감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잔잔히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빛입니다. 여러분, 느끼십니까! 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찬양을 불러보세요.?“하나님,?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그 사랑의 눈빛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면, 자녀는 안정감을 가지고 꿈을 향하여 도전할 것입니다. 그 눈빛으로 교인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안정감을 가지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눈빛만 보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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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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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화무십일홍
    드라마 카지노의 한 장면을 보면, 정팔(배우 이동휘)이 무식(배우 최민식)에게 ‘권무십일홍’ 이라며 “열흘 동안 피어있는 꽃은 없다”라고 유식한 척합니다. 그 말을 무식이 받아서 ‘화무십일홍’으로 정정해줍니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 즉 인생 부귀영화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남송의 시인 양만리의 시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성경에도 같은 내용의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 40:6~8) 아무리 잘 나가는 인생도 언젠가 풀의 꽃처럼 떨어지고 쇠잔할 때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육체를 너무 자랑하지 말고, 늘 겸손한 삶의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심장이 2배 이상 튼튼하여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넜다는 조오련 씨도 57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이봉주 씨도 근래 허리 통증으로 투병하며 “잠시라도 뛰어보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해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세계적인 모델이며 패션 디자이너이자 작가인 크리시다 로드리게스는 암에 걸렸습니다. 그녀가 임종 직전 인터넷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나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차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병원 휠체어에 앉아 있다.” “내 집에 디자인이 다양한 옷과 신발, 장신구 등 비싼 물건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병원의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다.” “은행에 아주 많은 돈을 모아 놓았다. 그러나 지금 내 병은 많은 돈으로도 고칠 수 없다.” “내 집은 왕궁처럼 크고 대단한 집이다. 그러나 나는 병원 침대 하나만 의지해 누워 있다.” “나는 별 5개짜리 호텔을 바꿔가며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 나는 병원의 검사소를 옮겨 다니며 머물고 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화무십일홍”과 같습니다. 이런 인생의 이치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도 들의 꽃처럼 시들고 마르게 됩니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9개 국어를 마스터한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고, 당시 최고 권력자인 남성 2명을 좌지우지했습니다. 그런 그녀도 화려한 침대 위에 독사를 풀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 마를린 먼로는 전 세계의 남성들과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마음마저 훔쳤지만 36세에 꽃처럼 갑자기 사그라져버렸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영웅호걸로 한 시대를 풍미해도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우리 기억 속에서 잊히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God-less) 인생의 결국은 “허무”만이 남습니다. 인생이 영원한 의미를 가지려고 하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이시며, 우리를 영원의 시간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하나님을 만난다면 영원한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내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들판에 피는 꽃과 같은 짧은 인생임을 알고 세월을 아낍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살아갑시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영원히 복이 될 것입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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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8
  • 시간이 빠르다고요? 시간이 답답하다고요?
    2022년 또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연세 드신 분은 세월 빠르다고 불평들 하지요. 또 포스트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신냉전의 국제정세로 인한 깊은 경제불황 등으로 인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은 지금 시간이 너무 답답하다고들 합니다. 가파른 금리상승, 집값 하락에 ‘휴~ 언제까지 견뎌야 하나?’ 답답한 시간을 불평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빠르다구요? 또는 시간이 답답하다구요?”라고 되묻는 한 소년을 소개합니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만난 17세 홍원기 소년입니다. 별명은 ‘시간을 달리는 소년’인데, 선천적으로 빠르게 노화되는 ‘소아 조로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병을 앓는 환자의 평균 수명은 15세. 전 세계 120명, 우리나라에는 단 한 명뿐인 희귀병입니다. 목사님 아들인 원기 군은 다섯 살에 소아 조로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의 가족이 운영하는 유튜브는 현재 23만 이상의 구독자를 가진 인기 유튜브입니다. 2년 전 처음 유튜브에서 본 15세 소년의 얼굴과 몸은 가냘팠지만, 그에게서 포기, 원망, 절망, 좌절 같은 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병 때문에 원망하기보다는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제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합니다. 하루하루 인기 유튜버로 즐겁게 살다 보면, 저도 멋진 어른이 될 수 있겠죠. 여러분도 모든 순간, 삶의 매시간을 사랑하세요” 어릴 적 철없는 친구들에게 외계인 같다고 놀림 받을 때면 속이 상했지만, “하나님 왜 이렇게 절 만드셨냐”라고 불평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때때로 죽음의 두려움이 닥쳐올 때면 눈물을 흘리곤 하지만, ‘나도 멋진 어른이 될 것’이라는 꿈을 꾸며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간다고 합니다. “원기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항상 제 곁에서 지켜봐 주시고 힘이 되어주시는 분입니다”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니?” 이 질문의 답변은 재미있습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머리카락 많이 자라게 해주세요. 머리카락 생기면 저도 염색을 꼭 한번 해 보고 싶거든요” 소년의 버킷 리스트는 ‘머리카락 갖기, 여친 만들기, 유튜브 구독자(욘니와 치애) 100만 되기, 아빠랑 영국 가서 손흥민 선수 경기 보며 응원하기’라고 합니다. 소년의 유튜브를 본 후 2년이 지났습니다. 소년에게 2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얼마 전, 한 방송사의 <뜨겁게 안녕>이라는 프로그램에 소년의 가족이 나왔습니다. 소아 조로증 환자에게 17세는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안녕 하우스>에서 아빠가 미리 20세 생일 케익을 준비하고, 가족이 함께 부르는 노래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후회하지 않도록... 최고의 하루를 사는 거야”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즈음,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린다’, ‘시간이 답답하다’ 이런 투정(?)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감사만 해야겠다 다짐합니다. 아들이 더벅머리를 하든, 꽁지머리(+염색)을 하든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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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8
  • 커피에 세례를 내려주다
    박해를 받았던 커피: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가 서양 음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커피는 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에서 먼저 음용되었고 특히 이슬람 종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15세기 무렵 커피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수도사들을 통해 메카에 전해집니다. 처음에는 야간 종교의식에서만 커피를 마셨으나 이후 종교의례행사 등에서 빠짐없이 등장하였고 메카 사람들은 이를 통해 커피를 접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커피 하우스가 생겨나면서 더욱 대중화되었는데, 당시 메카(1511년)의 새로운 총독에 임명되었던 카이르 벡 (Khair Beg)는 이러한 일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이 커피 하우스에서 자신의 통치를 반대하는 대화를 나누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총독은 커피 하우스에서 자신을 비웃는 시를 쓴 무리를 잡아들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총독은 사람이 아닌 ‘커피’에게 벌을 내리는 황당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메카 시내의 모든 커피 하우스에 폐업 명령을 내렸고, 이를 어기고 커피를 마시는 자들은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당나귀에 거꾸로 매달린 채 날뛰는 당나귀 위에서 고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커피 박해는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철회되었는데, 바로 이슬람교의 최고 지배자 술탄 덕분이었습니다. 술탄을 포함한 많은 궁정 관료들이 이미 커피를 애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독에게 커피 금지령을 철회할 것을 명하였고 즉시 메카에서 다시 커피가 허용되어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커피에 세례를 내려주다: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초기에는 이슬람에서 건너왔다는 사실 때문에 ‘이교도의 음료’, ‘이슬람의 와인’으로 부르며 커피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피를 한 번 맛본 이들은 그 맛에 빠져들어 너도나도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로마에서 커피가 전해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부 성직자들과 광신도들이 주체가 되어 커피를 탄압하여 커피가 기독교 세계에서 추방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커피는 이슬람의 음료이며, 곧 ‘사탄의 음료’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이 커피를 마시는 행동은 사탄이 만든 덫에 빠지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커피를 금지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전해 들은 교황 클레멘트 8세는 사탄의 음료가 궁금해졌고 커피를 맛보고 싶어졌습니다. 커피 맛을 본 교황은 뜻밖의 답변을 내린다. ?“사탄의 음료가 어찌 이렇게 맛있을 수 있느냐? 당장 커피에 세례를 내려 사탄을 쫓아내고 이를 진정한 기독교의 음료가 되었음을 명하노라.” 이로써 커피는 교황에게 인정받아 세례까지 받은 기독교의 음료가 되었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커피는 죄가 없었습니다. 커피는 밥이나 과일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일반은총입니다. 커피가 문제가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선한 사람이 마시고 선한 일을 하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피를 거룩하게 하는 길은 커피에 세례를 베풀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바르게 거룩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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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4
  •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오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든, 일을 하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예배당에서 현장 예배를 드리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에서 엔데믹 세상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동안 모든 생활 속에서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혹독한 경기침체가 시작됐다고 예상합니다. 전쟁과 신냉전 상황은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합니다. 게다가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 재앙까지,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올지 모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코로나, 전쟁, 기후 변화보다 더 우리 인생에서 위험한 것은 하나님을 놓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어떠한 것에 매여 사는 인생이 가장 어리석은 인생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좀 느리고 부족해도 하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꼭 붙들고 동행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극복할 수 없던 것들을 극복하게 합니다. 넘을 수 없는 한계선을 넘을 수 있게 합니다. 절대 꺾이지 않았던 마음의 언덕을 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등을 떠밀기 때문입니다. 세찬 비바람과 마주하며 우산을 쓰고 걸어가면 한 발짝도 나가기 힘듭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주면 앞으로 쭉쭉 나가게 됩니다. 비행기도 바람을 타면 더 빨라지고, 바람을 거스르면 비행시간이 길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등 뒤에서 우리의 가는 길을 밀어주는 바람과 같습니다. 물동이를 버리고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삶의 예배자로 살았던 수가성 여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 예수님을 보기 위해 체면 다 버리고 뽕나무에 오른 세리장 삭개오. 이렇게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는 사람마다 넘을 수 없었던 자신의 언덕을 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광을 본 사람은 은혜가 충만해집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승리를 맛본 날,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에 기뻐한 날, 가정에 아이가 태어난 날 등 영광을 본 그 순간 우리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됩니다. 너그러워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치킨집 사장님은 홀에서 TV 중계를 보던 손님들에게 ‘지금 먹고 있는 것은 공짜!’라고 외칩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누린 사람들도 그렇게 변화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렸음에도 여전히 그대로인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다른 이들에겐 매우 인색한 우리 모습을 봅니다. 은혜받은 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자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병폐입니다. 그리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됩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가장 놀라운 사건은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예배자로서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할 때 세상은 지금보다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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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적(敵)은 안에도 있다
    2015년 3월 24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독일 뒤셀도르프 국제공항으로 가던 저먼윙스 독일 여객기가 프랑스 남부 알프스 산맥에 추락하면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한 결과 부기장이 일부러 알프스 산에 충돌시킨 자살비행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사고 여객기의 부기장은 기장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조종실 문을 안에서 잠갔습니다. 그가 여객기를 알프스에 충돌시키기 위해 비행했던 8분 동안 아무도 조종실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9.11테러 이후 전 세계 항공사들이 여객기 납치 예방을 위해 조종실 문을 안에서 잠그면 밖에서는 절대로 열지 못하는 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9.11테러 이후 항공업계는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했지만 ‘내부의 적’을 막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적은 안에도 있다’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조정은 일본을 살피기 위해 황윤길과 김성일을 파견했습니다. 일본을 탐색하고 돌아온 황윤길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보고했고, 김성일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평화를 좋아했던 조정에서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보고를 채택했습니다.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조선은 전쟁을 대비하지 못하고 임진왜란으로 7년간 국토가 황폐해졌고, 수많은 부녀자가 왜군에게 유린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적은 밖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선조를 이은 광해군은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청(淸:후금)과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명나라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며 능양군(인조)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분노한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는데 그게 병자호란입니다. 신하들은 인조를 모시고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인조는 청 태종 앞에 삼궤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적은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36년간 일제의 속국이 되는 한일합병도, 수많은 죽음과 전쟁 고아를 만들어낸 6.25 전쟁도 적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과 자식들 간의 분열에 있었고,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 아들 간의 분열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내부의 적 때문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신앙도 망하게 하는 적은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새사람이라도, 여전히 범죄한 아담의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망하게 하는 적은 이 옛사람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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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30
  • 감사 주일의 단상
    이번 추수 감사 주일에는 감사를 글이나 그림처럼 자신이 가진 여러 가지 재능으로 표현해 보자고 광고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지구상에 하나뿐인 작품들이어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글자 수를 고려해서 그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순례자의 여정과 고백 ○○○ 권사 알람 소리에 새벽 단잠이 깼습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새벽을 어둠의 한 발악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제일 먼저 성경을 몇 장 읽고 나서 어둠 속에서 교회로 향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마음을 쏟아내고 교회를 나서면 어느새 어둠은 물러가고 하늘에는 별 대신 솟아난 동녘 해와 탁 트인 쾌청한 하늘이 보입니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조용한 거리를 걸으며 하루 일과를 되뇌어 봅니다. 보람찬 하루도 있지만, 그저 그냥 지나간다고 할까. 정말 멋이 없는 하루를 보낼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많은 기도와 감사, 이것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많은 은혜요, 내 마음의 고백이요, 내 입의 노래입니다. 하루의 마지막은 꼭 성경을 몇 장 읽고 시편 23편 말씀을 암송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 나는 당신의 양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2).” 이 말씀을 계속 되뇌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든답니다. 이렇게 해서 저의 하루는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젊을 때는 이 연결을 잘 몰랐지만, 이제 나이 연한이 기울다 보니 하나님과 나와의 이 연결이 참으로 좋습니다. 연로하신 권사님께서 평범한 일상을 덤덤히 표현하신 글입니다. 이 글뿐만 아니라, 작품 하나, 하나를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김현승 시인의 <감사하는 마음>이란 시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 주인(主人)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아는 마음입니다. 사람에 대한 감사도 상대방을 아는 마음, 곧 그를 이해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며 아침까지 새벽기도를 하시고 걸어가시는 권사님의 뒷모습과 그 일상이 그대로 그려집니다. 권사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줄 “연한이 기울다 보니 하나님과 나와의 이 연결이 참으로 좋습니다” 이 부분이 와 닿습니다. 제가 작품을 내신 분들을 알고 이해하고 읽기에 더욱 감사가 깊어집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자연이 눈에 들어와서 깊은 감동을 하고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뒷동산을 산책하다가 겹겹이 쌓인 낙엽을 밟는 소리와 깊게 물든 나무들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권사님의 연세에 비할 바 못 되지만 나이 때문인 듯 합니다. 어찌 되었건 감동, 감탄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 같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동받고 감탄하며 감사하는 것이 나이 때문이라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두근대면 무죄! 설레지 않으면 유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도 이 말을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일상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또 목회자로서 교우들과의 만남에도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통하여, 이 일을 통하여, 이 만남을 통하여 어떤 선물을 예비하고 계실까! 두근대면 무죄! 아무런 기대도 감사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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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비판보다 어려운 것
    많은 분들이 정의로운 비판을 하면 자신이 정의로운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 냉철한 지성을 자랑하며 투사처럼 판단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철들면서 비판하는 것이 제일 쉽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비판이 옳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비틀거리는 사람을 비난하지만, 그가 구타당한 모습은 보지 못합니다.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속사정을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린 볼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세로 사람을 상대해야 합니다. 누구도 쉽게 정죄해서는 안 되고 보이는 대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순간적으로 판단하려 합니다. 그 사람의 속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보이는 것만으로 비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보이는 것 하나만 가지고 곧바로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선동 선전, 사기, 이간질에도 쉽게 넘어갑니다. 좀 더 볼 수 있을 때까지 잠깐 판단을 멈추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마7:1)”라고 하셨습니다. 비판하는 자는 같은 내용으로 비판받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유명인 중에 과거에 자신이 한 비판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와 곤혹을 치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좋은 말, 의로운 말만 골라서 해야만 하는 목사로서 가슴이 뜨끔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경우에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떻게 사회가 비판 없이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공동체나 정당한 비판이 없다면 잘못에 대하여 책임질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실패한 지도자나 정책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역사는 퇴보하며 나라는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민주적 방식의 선거제도는 정당한 비판을 통하여 잘못된 지도자는 퇴출하고 잘하는 지도자는 더욱 잘하도록 기능합니다. 또한 자기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자세를 가지게 합니다. 이렇게 정당한 비판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우린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비판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첫째,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며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둘째, 자신이 비판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인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지적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셋째, 사랑이 없는 비판은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책망은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때리는 어머니도 맞는 아들도 함께 눈물 흘리며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내게 사랑이 없다면 함부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판단을 맡길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비판보다 어려운 것은 사랑으로 감싸고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연습하고 길러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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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2
  • 성경에서 금을 캐어냅시다.
    성경은 지금부터 대략 3500년 전부터 2,000여 년 전까지 약 1500년 동안 기록되었습니다.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물론이고, 내용과 보존 형태만 놓고 보아도 여느 책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책입니다. 성경만큼 오래되었으며,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과거나 현재나 한결같이 읽히고 있는 책은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단순히 유익한 고전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진리입니다. 성경 속에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으며, 인생을 사는 지혜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인생의 보물을 캐어내어야 합니다. 성경은 지혜의 책입니다. 욥기의 말씀에 보면, 사람이 지혜를 찾아가는 과정을 금을 캐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욥 28:1-2). 본래 금은 땅에서 캐낼 때 돌과 같은 불순물하고 섞여 있습니다. 제련 과정을 거쳐서 불순물을 걸러내야 순도 높은 금이 나옵니다. 이같이 성경도 금의 원석과 같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나오고, 인간의 말도 나오고 때로는 사탄의 말도 나옵니다. 성경에는 의인의 행적도 있지만, 악인들의 행적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같이 훌륭한 신앙의 위인들도 있지만 애굽의 바로와 같은 사람도 있고, 가롯 유다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 읽는 분들은 성경 한 페이지마다 쉼표도 없이 빼곡하게 기록된 글을 보면, 읽기도 전에 어렵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로 쉬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책이요 지혜의 책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혜가 여기 있다.’라고 믿어야 합니다. 설령 내 생각과 다른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이 금과 같이 소중하고 귀하다면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을 최종 최고의 권위로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성경 속에서 금을 캐어낼 수 있습니다. 요즘 유튜브가 유행이지요. 유튜브 영상 중 성경에서 금을 캐어낼 수 있도록 가이드를 잘해 주는 채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튜브는 성경에 대해서 안 좋은 얘기, 설명하기 난처한 얘기들만 조목조목 고르고 뽑아내서 그럴듯하게 설명합니다. 겉으로는 성경 이야기를 하는 듯했지만 실은 성경을 깎아내리고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도록 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돌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금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구원의 책으로 읽습니다. 인생을 사는 지혜가 성경 속에 있음을 믿고 읽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전혀 생각지 못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하늘을 붕붕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습니다. 너무 좋아서 혼자 손뼉을 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마치 황홀하고 멋진 꿈을 꾼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금을 캐는 사람에게는 이런 은혜가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읽도록 합시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는 여러분 모두가 금을 캐는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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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9-28
  • 목회단상> 뽑고 심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
    한 청년이 수도사의 길을 걷기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장은 그에게 권총 한 자루를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 생활이 답답하면 공중을 향해 한 방씩 쏘면서 마음을 푸십시오.” 그는 답답해질 때마다 수도원 뒷산으로 올라가 권총을 쏘면서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권총으로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수도원장실로 갔지만 원장은 없었습니다. “원장님이 어디 계실까요?” “아마 뒷산 너머에 계실 겁니다.” 뒷산 너머로 수도원장을 찾아간 그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따다다다따다다….” 하늘을 향해 기관총을 쏘고 있는 수도원장을 봤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 국내외 정세, 물가상승과 고금리, 환율상승 등에 따른 답답하고 염려스러운 마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이 필요합니다. 평안한 마음을 위한 조언은 많습니다. ‘좋았던 일들을 기억하라’ ‘긍정적으로 말하라’ ‘봉사하라’ ‘바쁘게 살라’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잠시 잠깐의 감정 진통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마음 속의 답답한 감정, 불안한 감정, 염려와 두려움의 감정, 분노의 감정 등이 뽑힙니다. 대신 평안함과 담대함이 마음에 심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안에서 뽑고 심는 일을 합니다. “나의 말씀을 네 안에 두라. 그러면 그 말씀이 파괴하고 뽑고 심고 건설할 것이다” (렘1:10). 종종 뉴스에서 검거된 흉악범 사이코패스의 얼굴을 공개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전혀 흉악범처럼 보이지 않고 너무나 평범할 때, 우리는 놀랍니다. 어떤 범죄심리학자는 사이코패스를 ‘정장 차림의 뱀’으로 비유했습니다. 세상에는 정장 차림의 뱀이 많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정장 차림과 같은 외모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뱀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외모에만 관심을 두기보다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운전자가 누군가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집니다. 술을 마신 사람이 운전대를 잡으면 아무리 좋은 차라도 비틀거리고 사고를 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려지면 뱀과 같이 인생을 망치는 나쁜 성품, 나쁜 습관, 나쁜 감정 등이 뽑힙니다. 대신 말씀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안내합니다. 우리 교회는 전교인이 성경통독 200독을 목표로 하여 읽고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더욱 깊게, 그리고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읽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뽑을 것은 뽑고, 심을 것은 심어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시고,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꾸어 가시길 축복합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9-21
  • 인생은 스토리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와 아이클 고힌이 함께 기록한 <세계관은 이야기이다> <성경은 드라마다> 라는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제목만 보면 드라마처럼 쉽고 재미있을 것 같지만, 철학으로 분류되는 세계관 서적이라서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책의 제목이 그 내용을 한 문장으로 쉽고 명쾌하게 요약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성경은 암호 코드로 된 책이 아니라, 메타 네러티브(=큰 이야기)로서 분명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세상과 인류의 기원과 끝, 그리고 끝 너머의 영원을 담은 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스토리의 작가이면서 연출가입니다. 성경 스토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 스토리는 개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큰 이야기입니다. 삶의 이야기이기에 공감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내 삶의 이야기, 곧 나의 과거, 현재, 미래, 나의 꿈, 내가 가야 할 길... 나의 스토리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지난 금요기도회 시간에 80년대를 풍미했던 포크송 그룹 해바라기의 멤버였던 분을 모시고 <미션 해바라기> 집회를 했습니다. 1부에는 히트곡을 불렀고, 2부에는 찬양 간증을 했습니다. 예배당에서 가요를 불러도 되나?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찬양과 간증은 삶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일(그 스토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의 삶의 스토리에서 노래는 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분들만의 독특한 하나님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 스토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구원’이라고 하는 보다 큰 이야기, 메타 네러티브의 한 부분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가수 김종찬 씨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는 제 세대의 토요일 밤을 불태우는(?) 기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스토리도 없이 특송으로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부른다면 누가 받아줄까요. 그러나 이 노래가 김종찬 목사님의 간증 속의 한 부분이 된다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공감, 그것은 스토리의 힘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1-2) 유명한 성경 구절입니다. 이 시편을 노랫말로 우린 찬양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제목을 보면,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도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게 된 다윗의 스토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힘이 됩니다. 그게 스토리의 힘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오늘 힘든 일이 있습니까? 가슴에 멍이 들고,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까? 나이가 들고, 몸도 마음도 쇠약하여 가는데, 내 인생은 그리다 만 그림같이 초라하다고 생각되십니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십시오. 더욱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고난도 눈물도 나만의 스토리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스토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작은 몸짓 하나, 흘린 눈물 한 방울까지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스토리의 결론을 내시는 분입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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