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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산을 넘어서
어떤 여인이 8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중 3명은 청각장애, 2명은 시각장애, 1명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홉 번째 아기를 임신 중이지만 성병에 걸려있습니다. 다수의 사람은 ‘낙태해야 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음악 천재 ‘베토벤’입니다.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투표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3명의 후보가 있습니다. 후보 A :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적이 있고, 두 명의 부인이 있으며,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8~10병의 마티니를 마신다. 후보 B : 두 번 회사에서 잘린 적이 있고,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 시절 마약을 복용한 적 이 있고 위스키를 즐겨 마신다. 후보 C : 전쟁 영웅이다. 채식가였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 맥주를 가끔 마신다. 불륜관계도 가져본 적이 없다. 당신은 어떤 후보를 택하셨습니까? 후보 A는 루즈벨트, 후보 B는 윈스턴 처칠, 후보 C는 아돌프 히틀러라고 합니다. 선입견(편견)은 인간이 가진 못된 생각입니다. 편견으로 사람을 대하다가 실수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면 가난한 집 아이가 먼저 의심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은 사람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볼 것을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정오에 기도하던 중, 보자기에 가득 담긴 부정한 것들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먹으라 했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부정한 것은 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내가 깨끗하게 했으니 먹으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그들에게로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Ice breaking - 얼어붙은 생각, 즉 편견을 깨뜨리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편견을 깨뜨리고 고넬료의 집으로 갔을 때,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수백 년 동안 편견으로 인한 멸시와 차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찾아가셨고,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10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후에 그에게 감사한 유일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찾으신 사건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야 합니다(행1:8). 사마리아는 유대 땅과 가장 가깝지만, 편견 때문에 땅끝보다 멀고 어려운 곳입니다. 가깝지만 오히려 더 멀고 불편한 사마리아 같은 관계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품고 넘어서면 땅끝까지라도 갈 수 있습니다. 더 깊고 풍성한 관계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런 관계를 품고 넘을 수 있다고 격려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처럼, 오히려 사마리아인이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편견을 깨신 분입니다. 결국 내 안에 수많은 편견도 예수로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 바람, 성령 바람으로 편견과 오해를 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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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만남과 이별을 대하며
만남과 이별을 대하며 새 가족 등록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만남이 많다는 것은 목사로서 행복입니다. 가수 노사연 씨의 ‘만남’이란 노래 속에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솔직히 가사가 여기까지 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남 속에 우연은 없습니다. 만남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우린 부모님과의 최초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죽고 난 후에 눈을 뜰 때, 영원한 존재들과 새로운 차원의 만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만남은 설렘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만남 뒤에는 이별이라는 그림자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우릴 아프게 합니다. 부모도,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사랑하는 연인과의 만남도 예외는 아닙니다. 살면서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사람이나 환경을 처음 대할 때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지나친 애착으로 이별을 감당치 못해서도 안 됩니다. 만남과 이별에 너무 무관심해도 안 되고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기에 우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전제는 만남과 이별 속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도 만남의 축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만남이 축복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하고 노력이 뒤따라야 하고 투자해야 합니다. 무관심과 이기심은 불행한 이별을 낳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별도 있지만 대부분의 이별은 노력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멀리서 사는 친척이나 친구와 전화 한 통 없이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결국 멀어지고 만남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별 속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에 반드시 손해만은 아닙니다. 이별은 아쉽지만,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준비이며 서로를 위한 하나님의 선이기에 축복하며 보낼 수가 있습니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만남이 축복되고, 이별이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보다 야망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행복했지만, 이별은 언제나 아팠습니다. 만남과 이별이 반복될수록 그런 감정이 무뎌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만남은 행복하고, 이별은 아쉽고 아픈 것은 아직 미숙해서일까요? 그래서 나름 터득한 방법이 있다면, 헤어질 때 인사를 잘하는 것입니다. “어딜 가든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그리고. “다시 만나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큰 복은 없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두 번의 교회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라 아팠고, 또 다른 사정으로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헤어지는 인사를 잘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곳에서 다시 만납시다” 참석한 교우들과 함께 찬송도 불렀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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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 개는 입으로 말을 못 합니다. 그래서인지 개는 사람에게 눈으로 말합니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새까맣고 큰 눈으로 주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반가움을 표합니다. 식사 때면 발치에 앉아 눈으로 ‘뭐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물론 식탁 밑 그 눈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집에서 나 혼자인 것 같기는 하지만요. 동물과도 눈으로 무언의 대화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데, 사람 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눈으로 말해요.?살짝이 말해요.?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눈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단둘이서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눈빛으로 전 세계를 울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사나 사진에 수여하는 퓰리처상이 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인물의 눈망울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큰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지선 교수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간증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대학생 시절 교통사고로 몸의 55%를 3도 화상을 입고, 40번의 대수술을 거치고서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한 화상으로 얼굴은 다 녹아내리고, 양손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은 다 절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굳이 다시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녀의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게 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눈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고 후 병원으로 옮겨져 화상 수술을 받고, 얼굴을 돌돌 감고 있던 붕대를 처음 풀던 날의 경험을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얼굴을 본 엄마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어요.”?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여전했다는 것. 한 존재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얼마나 그 존재에게 안정감을 주고 자존감을 부여하는지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은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집에 누워 있는데, 부인이 빨래를 개라고 시켰답니다. 자신은 암 환자니까 이제 그런 일을 안 시킬 줄 알았답니다.?‘나 환자잖아~’?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산더미 같은 빨래를 자기 앞에 밀어주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뛰어가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아이는 호들갑 떠는 부모를 보는 순간 울음보가 터집니다. 그러나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면, 자기도 대수롭지 않은 듯 스스로 털고 일어난다고 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약하고 서툰 못난 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안정감은 나를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입니다. 그 눈빛을 느껴본 사람은 편해집니다. 그 안정감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잔잔히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빛입니다. 여러분, 느끼십니까! 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찬양을 불러보세요.?“하나님,?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그 사랑의 눈빛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면, 자녀는 안정감을 가지고 꿈을 향하여 도전할 것입니다. 그 눈빛으로 교인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안정감을 가지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눈빛만 보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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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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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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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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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
- 마음이 답답하여 가평에 있는 필그림 수양관에서 하루를 머물다 왔습니다. 단 하루이지만 꿀 같은 안식의 시간이었습니다. 산속 공기가 좋았고, 천로역정 코스로 꾸며 놓은 산책로도 흥미로웠습니다. 오랜만에 주님만 바라보고 명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침묵 기도를 하는 곳이어서 잠시 졸음과 싸우느라 힘들었지만, 고요한 중에 주님을 대하는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고요하다가 한 번씩 강하게 임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참 행복했습니다. 무언가를 달라며 졸라댄 것도 아닙니다. 거저 주님 바라보며 앉아 있을 뿐이었는데 주님은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선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동화책같이 권선징악이 뚜렷하지도 않고, 내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때론 주님이 내가 원치 않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실 때도 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는 답답합니다. 그래도 주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더욱 주님 손 꼭 붙잡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설탕이나 버터는 달기는 하지만 건강에 썩 좋지 않습니다. 소금은 짜서 싫습니다. 베이킹파우더도 그냥 먹기 힘듭니다. 밀가루는 호불호가 갈립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합쳐서 구웠더니 맛있는 과자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이렇게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하나 보면 거친 것입니다. 호불호가 갈립니다. 그러나 모두 합치면 과자가 됩니다. 낱개로 보면 싫은 것도 하나님이 합력하시면 유익한 것이 됩니다. 고난은 쉽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큽니다. 그리고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이것을 믿는 신앙을 ‘섭리 신앙’이라고 합니다. 섭리 신앙으로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까지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에펠탑을 건립할 당시, 파리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모파상을 비롯한 많은 지성인이 무척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탑이 완공된 후 모파상은 매일 에펠탑 카페에 올라가 차를 마시고 글을 썼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그렇게 이 탑의 건립을 반대하고 싫어하던 당신이 어떻게 이 탑을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모파상은 "탑에 들어와 앉아 있으면 이 탑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모순된 일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비판과 반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절차를 거쳐 일의 방향이 결정되면 비판 대신 협력을 통한 상생의 기쁨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공동체는 성숙과 발전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교회의 일도, 국가의 일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이 나라도 보다 성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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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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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 부흥회를 앞두고
- 2020년 2월 입당 예배 이후에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상은 급속히 변했습니다. 행복한 변화가 아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교회에 불어닥친 변화의 현실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예배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교회의 정의는 ‘에클레시아’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예배도 모임이고, 모여야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더욱 힘써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언택트 시대, 모이는 것을 미덕이 아니라, 민폐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모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온라인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신학적 정당성에 대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미 온라인 예배와 모임 등은 포기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는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기술로 언택트 상황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은 교회들은 그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인의 수가 감소하고, 일부는 문을 닫았습니다. 아직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조금만 견디자’ 하는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시간아, 흘러라. 조금만 견디자’ 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가장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으로 활용했습니다. 예배는 현장과 온라인 양쪽 모두 은혜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멘토링 양육, 제자훈련 등을 통하여 신앙을 내면화하며, 리더를 세우고 공동체의 성숙과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교인 숫자도 급속히 늘고 있습니다. 팬데믹 시대에 우리처럼 성장하는 교회는 드물 것 같습니다. 제자훈련 시간에 성도님들께서 바쁘게 달려온 저에게 안식년을 제안하였습니다. 참 감사하고, 뭉클했습니다. 그 따뜻한 배려는 이미 저의 마음에 안식과 재충전을 주었습니다. 가속을 받아서 달려야 하는 시기에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습니다. 대신 착한 양 떼를 위해서 아프지 않고 더욱 잘해야지 다짐해 봅니다. 교회도 이 시점에서 본질을 점검하고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할 때입니다. 하계 부흥회 주제가 “리부트하라!”입니다. 리부트(Reboot)란 본질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새롭게 하는 시작을 말합니다. 재부팅을 위해 먼저 on을 off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3일간 개인적인 시간을 off 합시다. 약속은 뒤로 미루고 예배에 참여합시다. 그것이 리부트를 위한 off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결단이 필요합니다. 복음 리부트 (강사: 김용의 선교사, 8/10 수, 저녁 7시 30분) 교회 리부트 (강사: 박건 목사, 8/11 목, 저녁 7시 30분) 기도 리부트 (강사: 이강목 목사, 8/12 금, 저녁 7시 30분) 참여한 모든 분의 삶에 하나님의 행하시는 은혜로운 일들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부흥하는 우리 교회가 더욱 은혜로운 사역을 열어가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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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 부흥회를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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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탄식이 가득한 현실 앞에서
- 어느 초등학생이 쓴 시라고 합니다. 제목 <개 팔자 상팔자>, “개 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가만히 있어도 때가 되면 밥을 주고/똥 싸면 똥도 치워주고/산책도 시켜 주고/자기 마음대로 낮잠도 자고/무엇보다 숙제를 안 해도 된다/다음 생에는 좋은 주인 만나/개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린아이가 무엇이 그렇게 힘들어서 개 팔자가 다 부러웠을까요. 아이들이 그렇다면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사는 성인들은 얼마나 힘들고 버겁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찬송가 515장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고.” 세상이 점점 발전되고 있다고 하지만 인류는 오히려 세상을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정신적인 혼란, 극한 피로, 생존을 위한 전쟁과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수많은 영상매체와 온라인을 통해 파고드는 불필요하고 거짓된 정보의 홍수는 영적인 영역까지 침몰시키려 합니다. 인생이 전쟁이 되고 고통이 되는 데는 많은 원인이 있을 겁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행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삶에서 밀어내고 나면, 결국 자신이 주인 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위하고, 자신의 만족과 욕심을 채우며 살기에 급급합니다. 어떻게든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내가 가지려 하고, 내가 좌지우지하려 합니다. 거기서 모든 문제와 다툼, 불행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쉼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현실 속에서 함께 하십니다. 나의 열심과 최선을 수단으로 삼고 선을 이루십니다. 때로는 그런 수단 없이도 우연을 가장하여 선을 이루기도 하시며, 그런 수단을 초월하는 기적으로 선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나의 실수와 악하고 불의한 일들을 거슬러 선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힘든 중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는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를 향한 놀라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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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탄식이 가득한 현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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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믿음의 사람이여 희망을 품어라!
-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밝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고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현실주의자라고 합니다. 현실의 높은 벽에 절망하며, 세상이 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조차 의심하고 게을리하는 사람을 회의주의자, 허무주의자, 염세주의자라고 합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많이 경험할수록 이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세계는 한때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며 머잖아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1, 2차 세계 대전과 경제 대공황을 겪으면서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러면서 회의주의자, 허무주의자들이 많아졌습니다. 20세기 후반 경제발전과 세계화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인간의 교만은 머리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사상적 배후에는 포스터 모던이라는 사조가 있는데, 이 사조의 뿌리는 철저한 인본주의입니다. 절대 진리, 절대자, 절대 규범 이런 것을 부정하며,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자유 인권의 미명하에 권위와 규범을 해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교만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다시 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보려고 하는 열심조차도 소용없는 오늘,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다시 회의주의, 허무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이런 부정적인 현상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속속 포기하고 있습니다. 옛날 6.25 전쟁의 폐허 더미 속에서도, 사람들은 천막 교회에 나아와서 기도하며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그 어려운 시절을 극복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었고, 신앙은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러나 2022년의 세상은 교회를 희망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향한 온갖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전과 같이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조심스럽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상황은 6.25 전쟁 이후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어버렸던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절망하고 포기해야 합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성경에는 언제나 희망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 곧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린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고, 그가 상 주심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희망 가득한 꿈을 그리고 기도하며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희망이 이 땅의 모든 성도의 얼굴과 삶의 태도로 나타난다면 교회는 다시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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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믿음의 사람이여 희망을 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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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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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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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생각하지 못한 은총이 있다.
- 수십 년을 교회 섬겼으나 경제생활은 가난한 집사님이 있었다. 시골 노모가 10년간 모은 돈 400만 원을 사업자금 하라 보내주셨다. 사업자금으로 쓰려 했으나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남에게 진 빚 갚았다. 그리고 퇴원비 없어 퇴원 못 한 성도를 위해 구제비 모금함에 선뜻 내놓았다. 이렇게 귀한 돈 다 쓰이고 말았다. 그 주일날 부유한 집사님과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시간에 가난한 집사님은 부자 집사님 보고 서러워서 울고 부유한 집사님은 감사해서 울었다. 예배 후 부자 집사님이 가난한 집사님 손잡고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4천만 원 되는 가게 하나 전세로 얻는 것인데 동업자는 2천만 원 준비했으나 자신은 돈 없어 준비 못 했다고 말했다. 언제라도 형편 되면 갚으라며 그 자리에서 돈 빌려 드릴 테니 사업하라고 2천만 원을 주었다. 실로 가난한 그에게는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게 산다 해도 주님의 말씀 따라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진실을 다 아시고 누구의 맘이라도 감동시켜 당신의 자녀들을 돕는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갖고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 어디서나 축복하신다. 사람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신다면 생각하지 못한 은총을 마련하신다. (고훈 목사님의 ‘목회일기’ 중에서 발췌)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 한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저 2장 9절 (새번역성경) 그렇게 저렇게 벌써 2022년 하프 타임에 다가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맥추감사절 예배로 떡도 하고 잔치를 했지만, 코로나 팬데믹 2년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위드 코로나’ 또는 ‘엔데믹’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방역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친 분도 계시겠지만, 분명한 주님의 음성이 마음에 또렷이 들려 옵니다. “그래도 감사하자!” “우짜든지 감사하자!”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은혜~은혜이다. 믿음으로 감사할 때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총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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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생각하지 못한 은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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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
- “꽃이 이렇게 곱게 피어 있는데 / 꽃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 우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꽃의 아름다움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하는 말이겠죠. 한 송이 꽃을 보고 노래하는 작가나, 붓을 드는 화가가 느끼는 감동은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꽃이 견뎌내야만 했던 인고의 시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살아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우리는 무언가를 당연히 여기고 고마움을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적인 것의 소중함을 생각지 못합니다. 만일 ‘당연하게 여겼던 소중한 것’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누구나 몇 가지는 떠오를 겁니다. 문제는 그 일상적인 것과 당연히 여겼던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점은 그것을 잃고 난 뒤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사람이 떠난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기에 십상입니다. 때늦은 후회라고나 할까요. 당연히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금요일 오후 긴급 기도요청 문자를 받았습니다. 오랜 친구 목사의 사모님이 수술 중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친구는 지금까지 시골교회를 목회하며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진실하고 성실한 목회자이지만, 타협이나 융통성이 없다 보니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아 사역지를 옮겨야 하는 아픔을 몇 번이나 겪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 몸이 약한 사모님이 겪는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가 컸나 봅니다. 목사님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새벽 1시면 일어나 기도합니다. 집에서 새벽까지 잠자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사모님이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그렇게 죄스러웠나 봅니다. 건강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건강검진 받는 시간이 아까워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모님도 암 3기가 지날 때까지 불편하셨겠지만 병원 한 번 가보지 않고,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로 가서 급하게 수술 했다고 하니, 그간의 고생에 마음이 저립니다. 토요일에야 연락이 닿아 통화를 하니, 늦게까지 수술을 마치고 경과를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전화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당연히 여겼음을 회개하며 치유를 구할 때, 저도 친구도 목이 메고 코끝이 시렸습니다. 친구 목사도 이제는 살아서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정말 소중히 여기며 살겠다고 말합니다. 친구야! 꽃이 이렇게 곱게 피었는데, 한 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어디를 그렇게 빨리 달려갔었나! 그렇게 말하고 보니 꽃을 보지도 않고 어딘가로 막 달려가고 있는 또 한 사람이 낯이 익습니다. 잘 보세요.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 소중한 것을 당연히 여기다가 떠난 후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 모두 다 소중합니다. 곁에 있어 더욱 소중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소중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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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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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신앙생활은 관계입니다.
- 신앙생활은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자신과의 관계이고, 그다음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들이 좋으면 삶이 풍성해지며 행복합니다. 반대로 관계가 좋지 못하면 삶은 힘들고 불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어린 생물들은 다 귀엽습니다. 강아지도 병아리도 예쁩니다.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어린아이 때의 모습은 예쁩니다. 그래서 사회는 특별히 아이들을 배려하고 보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습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란 “주여, 저는 연약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는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세리는 감히 고개를 못 들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세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고개를 들고 “저는 나쁜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다 잘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니 잘났다.”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세리와 같은 자세로 설 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세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 ‘의(헬, 디카이오스)’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보호받고, 은혜를 입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자신과의 관계가 좋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죄책감과 열등감, 자학, 자기 연민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자신과의 좋은 관계를 훼손합니다. 자신을 용서치 못하고 하찮게 여기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모습은 정확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도 정확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나, 하나님이 보시는 자신의 모습이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보배롭고 존귀한 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웃과 좋은 관계 속에 살아야 삶이 풍성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가는 곳마다 싸움닭처럼 다투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투며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다투며 많은 봉사를 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좋은 열매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을까요? 빌립보서 2:3 말씀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면 됩니다. 또 한 가지, 인색하지 않으면 좋은 관계를 맺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고 계산이 밝습니다. 밥값 한 번 안냅니다. 자꾸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를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관계가 좋아지려고 하면 지갑을 열면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과의 좋은 관계 속에서 풍성하고 행복한 신앙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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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신앙생활은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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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하며
- 지난 코로나 2년의 세월은 ‘숨 막히는 시간’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마스크 쓰기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물론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기독교 예배는 신앙고백, 기도, 찬송, 설교 등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당연히 마스크를 쓴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는 숨이 막힙니다. 날씨가 더워지면 더욱 답답합니다. 그것도 일상이 되니 적응이 된 듯합니다. 마음껏 숨 쉬며, 말할 수 있는 세상은 축복이었습니다. 마스크 착용 말고도, 코로나 이후 세상은 더욱 숨쉬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작년에 미국에서 흑인 피의자가 백인 경찰에 의해 목이 눌린 상태로 ‘숨을 쉴 수 없다’라는 말을 반복하다가 숨이 막혀 죽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사건은 인종차별이라는 숨 막히는 미국의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기독교 정신은 어디에 갔을까요? 곧이어 흑인들의 항의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그 시위는 방화와 약탈이라는 범죄로 바뀌었습니다. 특별히 교민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건장한 흑인들이 동양인을 무차별 폭행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차별의 피해자가 차별의 가해자가 되며, 약탈과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모순적인 현실을 보면서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힙니다. 그 무렵 우리 사회에서는 계모에 의해서 여행용 가방 안에 아이가 몸을 접쳐서 갇혀 있다가 숨이 막혀 죽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가슴 아픕니다. 정치 현실을 보나, 남북관계를 보나, 국제정세를 보나, 숨이 막힙니다. 최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핵시설을 공격하고, 질소탱크를 폭발시키고, 민간인들까지 무차별 살상하는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보면서 숨이 막히고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코로나와 전쟁의 장기화로 인하여 세계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먹구름 아래에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기 침체와 물가 급등,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인한 가계 부담의 짐은 더욱 숨이 막히게 합니다. 그 외에도 생각하면 노동의 현장에도, 교육의 현장에도, 심지어는 가정과 교회 안에서도 숨 막히는 일들은 너무 많습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의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한 말을 들을 때면 숨이 막힙니다. 이렇게 숨 막히는 세상이 된 것은 모두가 자기만을 위해 일방적으로 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는 사회와 경제를 멈추게 했습니다.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멈출 때, 사람들은 인생의 본질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안식을 명하신 날입니다. 이날은 일을 멈추고 안식하며, 본질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영원의 시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자연과 현재 일들의 영적인 의미를 보게 됩니다. 쉼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배하며,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감동으로 호흡합니다. 그 호흡으로 또 다른 사람들을 숨 쉬게 하며,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거의 모든 방역 규제들이 다 풀렸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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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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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커피생각 & 예수님 생각
- 요즘 커피가 유행입니다. 어떤 경우는 식사비보다 식후에 마시는 커피 값이 더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네만 해도 카페가 넘쳐납니다. 카페 거리가 형성될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나는 언제부터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상가교회 있을 때, 커피 전도를 위해서 핸드드립을 배우면서 커피 맛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때는 아이스커피 한 잔이면 머리까지 시원해집니다. 서브에 얼음 넣고 막 로스팅한 신선한 원두를 갈아서 핸드드립을 하면 뚝뚝 떨어지는 커피가 얼음을 타고 녹아내리면서 희석되고 그 고소한 향을 발산할 때면 시각도 후각도 호강합니다. 투명한 컵에 따르고 한 모금 머금으면 깨끗한 커피 향이 입 안 가득, 그리고 머리까지 맴도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재벌도 부럽지 않습니다. 제가 커피를 마시며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담뱃재 냄새 같다고 심술을 부리기도 합니다. 카페에 가면 여러 가지 커피가 있죠. 여러분은 어떤 커피를 주문하십니까? 연하게 마실까, 달콤한 걸 마실까, 차게 마실까 등 많은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커피 종류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에스프레소입니다. 양도 아주 적은 데다 진하고 써서 아무도 안 마실 것 같은 커피입니다. 그런데도 카페마다 에스프레소는 꼭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에스프레소가 모든 커피의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에스프레소에 따뜻한 물을 넣으면 아메리카노가 되고 따뜻한 우유를 부으면 카페라테가 됩니다. 여기에 우유 거품을 진하게 내서 계핏가루나 초콜릿 가루를 뿌리면 카푸치노가 되고 캐러멜시럽을 첨가하면 카라멜마키아토가 됩니다. 초콜릿 시럽을 넣으면 카페모카가 되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커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커피의 기본인 에스프레소는 ‘커피의 심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생각해 보니 교우님들 중에는 바리스타도 계시고, 카페를 운영하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네요. 그래서 다시 목사로 돌아와 주제를 바꾸어 봅니다. ‘믿음의 심장’은 무엇일까요? 빠질 수 없고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예수님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자랑도, 헌신도, 충성도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우리의 심장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죽습니다. 예수님이 있으시면 삽니다. 심장 맞습니다. 어디에 서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언제까지요?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사시며 일하심을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내 모든 믿음의 근원이며 중심이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갈망합니다. 오늘부터 교회 카페 사역을 시작합니다. 카페 이름은 플랫폼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플랫폼, 성도와 성도 사이를 잇는 플랫폼, 교회와 이웃을 잇는 사랑의 플랫폼이 되길 기도해 주세요. 커피 향 가득한 공간에서 은혜를 나누고 행복이 배가 되길 기도해 주세요. 오늘 주일도 커피 향기 & 예수님 향기 가득하여 행복한 날이 되길 기대합니다. 장윤석 (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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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커피생각 & 예수님 생각


